개인들은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면서 남아도는 자금이 늘어난 반면 기업들은 직원의 임금 등 운전자금을 빌리려는 수요가 많아지면서 자금부족 규모가 크게 증가했다. 이는 개인들이 극도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으며 영업이익만으로 운영이 어려워진 기업들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해 경기불황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24일 발표한 ‘1ㆍ4분기 중 자금순환동향’에 따르면 소비심리가 위축된데다 주택마련대출이 크게 줄어들면서 개인의 저축액이 빌린 돈보다 12조3,000억원이나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러한 자금잉여 규모는 지난 99년 1ㆍ4분기 15조9,000억원 이후 최고치다.
안 쓰고 모은 돈으로 빚을 갚는 경우도 늘면서 개인 부문의 부채증가율은 누그러지는 추세다. 1ㆍ4분기 말 현재 개인부채는 485조5,000억원으로 전 분기 말보다 0.6% 늘어나는데 그쳤다. 이는 지난해 4ㆍ4분기 부채증가율 2%보다 크게 둔화된 것. 가구당 부채는 3,174만원, 1인당 부채는 1,007만원을 기록했다.
개인의 부채상환 능력을 나타내는 금융부채잔액에 대한 금융자산잔액의 비율은 전 분기 2.06에서 2.08로 상승, 5년 만에 처음으로 소폭이나마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변기석 한국은행 경제통계국장은 “개인의 자금잉여 증가와 부채상환 능력 개선은 극심한 소비위축과 주택마련대출 감소, 카드빚 상환 증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변 국장은 “이번 결과는 가계의 구조조정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며 “가계가 군살 빼기로 건전해지면 앞으로 경기가 개선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덧붙였다.
기업은 금융권에서 빌린 돈이 저축한 돈보다 15조7,000억원 많았다. 이 같은 자금부족 규모는 2000년 1ㆍ4분기 16조2,000억원 이후 최고다.
보통은 기업 부문의 자금이 크게 부족할 경우 설비투자를 하려는 기업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변 국장은 “운전자금을 빌리려는 내수 위주의 중소기업들이 늘어나면서 기업의 자금부족 규모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새로 설비투자를 하기 위해 돈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월급 등 기업을 유지시키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돈을 마련하려는 목적에서 자금을 조달한다는 뜻이다.
자금운용 면에서는 저금리 기조로 인해 개인과 기업 모두 대형 은행에 돈을 맡기기보다는 상호저축은행에 예금하거나 수익증권 등 유가증권에 투자하는 사례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은 1ㆍ4분기에 5조원의 금융기관 예치금을 빼내 MMF 등 유가증권에 9조8,000억원을 투자했다. 개인은 금융기관 예치금이 전 분기 20조원보다 크게 줄어든 5조4,000억원을 기록했다. 반면 유가증권 투자는 전 분기 -2조6,000억원에서 8조5,000억원으로 대폭 늘었다. 한국은행은 “연초 카드사 유동성 위기가 일단락되면서 개인 등의 자금운용 패턴이 안전성에서 수익성 위조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정부 부문에서는 재정의 조기집행으로 자금조달 규모가 16조8,000억원에 달해 전 분기의 2배 이상으로 늘었다. 그러나 세수증가로 인해 운용규모도 19조5,000억원으로 확대, 자금잉여액이 전 분기와 비슷한 2조6,000억원으로 집계됐다. 민간 부문의 자금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정의 역할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