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현장 제일주의

정운호 <더페이스샵코리아 사장>

7년 전에 다녀온 미국 출장이 내 삶의 전환점이 될 줄은 몰랐다. 당시 뉴욕 거리를 걸으면서 의류 브랜드인 ‘H&M’과 ‘GAP’을 보고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좋은 디자인과 원단의 옷을 저렴한 가격에 대량 공급하면서 톱스타를 광고 모델로 쓰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어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좀처럼 눈을 붙이지 못했다. 출장길에서 얻은 영감이 더페이스샵이라는 브랜드를 론칭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남대문 장사 경험이 보약 좋은 품질의 화장품을 저렴한 가격에 팔면 소비자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이런 설레는 마음으로 돌아온 나는 몇 년 뒤에야 사업구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기본원칙이 있다면 ‘현장제일주의’다. 나는 스물한 살에 남대문시장에 뛰어들어 장사를 배웠다. 그래서인지 피부로 느끼는 노력의 산물인 땀냄새 나는 현장이 너무 좋다. 어렸을 때 공부는 그다지 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남에게 지는 것은 싫었다. 장사를 할 때 “백화점 제품을 시장 가격으로 판다”고 목청을 높이며 흥정했는데 지금의 나는 말 그대로 좋은 화장품을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다. 남대문시장과 화장품 대리점 등에서 잔뼈가 굵어서인지 생동감 넘치는 현장에 있을 때 살아 움직이는 기분을 느낀다. 요즘 매장 수가 늘면서 일정이 매우 바빠졌다. 하지만 주말은 마음도 몸도 더 분주해진다. 서울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매장을 찾아 부족한 점은 없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평일에도 매장을 몇 군데 다녀온다. 아랫사람들이야 젊은 사장의 꼼꼼한 성격이 부담될 수도 있지만 아직은 현장의 냄새를 맡는 게 행복한 나이이니 어쩌겠는가. 최근 오래간만에 명동 매장 앞에서 흰 띠를 어깨에 두르고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 사람이 가장 많은 일요일 한낮의 명동거리. 나와 비슷한 연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에게 화장품을 알리느라 다른 건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셔츠가 땀으로 젖는 줄도 모르고 목소리를 높였다. 뻑뻑해진 목을 가다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처음 화장품 사업을 시작할 때는 남대문에서 장사를 한 게 흠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화장품은 이미지가 중요한 사업인 만큼 ‘경력이 좀 더 번듯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다. 고생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두고두고 보약이 되는 것 같다. 더페이스샵은 훌륭한 회사와 어르신들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다. 해야 할 일도 많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린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불황과 호황은 자기 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불황 극복은 자기 하기 나름 젊은 나이에 장사를 시작해 우여곡절을 겪고 이 자리까지 온 나는 19년 가까이 ‘호황’이라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주위에서 늘 “경제는 어렵다”고 했다. IMF 외환위기 때는 고의 부도를 맞아 심한 배신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열정을 쏟아 붓고 최선을 다하면 불황도 이기지 못할 벽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거저 얻어지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그 점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자신이 현장에서 흘린 땀만큼 열매를 얻는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현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 전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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