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자금시장 이상기류] "고수익도 싫다" 큰손들 몸사리기

[자금시장 이상기류] "고수익도 싫다" 큰손들 몸사리기 非실명채·달러에 뭉칫돈…자금시장 왜곡 심화 자금시장의 이상 기류가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열병처럼 번졌던 벤처투자에서 '참패'한 사채시장의 전주들이 돈 굴릴 곳을 찾지 못하고 무기명채권투자와 달러 사재기에 나서는 등 '몸사리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관련기사 시장 관계자들은 "증시 불황의 장기화 전망과 동방금고 사건으로 비롯된 신분노출 우려, 여기에 금융소득종합과세 시행과 '돈세탁방지법'제정 예고 등으로 시장의 분위기는 일시에 반전됐다"며 "자금 흐름이 정상을 되찾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전망하고 있다. ◇'묻지마 채권'품귀, 위조채권도 성행= 지난 98년 하반기 사채시장에서 움직이는 음성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발행된 비실명장기채권이 요즘 시장에서는 '묻지마 채권'으로 통한다. 당시 비실명 장기채권은 고용안정채권, 증권금융채권,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 유통 증권금융채권 등 총 5조1,735억원이 발행됐다. 비실명으로 매입할 수 있다는 혜택에도 불구하고 발행 당시에는 이 채권이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 당시 금융권 수신금리가 20% 안팎에 달했지만 비실명장기채의 이자는 5.8~7.5%로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한참동안 이 채권은 투자가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있었지만 최근 들어 품귀현상이 일어날 만큼 인기가 치솟고 있다는 것이다. 시중은행의 한 프라이빗 뱅킹(PB)담당자는 "'묻지마 채권'1억원 어치에 대한 프리미엄이 최근 1,000만~2,000만원을 호가한다"며 "이는 만기에 일시 지급되는 이자를 모두 얹어 사는 것으로 투자수익은 한푼도 없거나 약간의 손실까지 감수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다른 은행 관계자는 "지난 8~9월부터 '묻지마 채권'의 수요가 폭증해 요즘은 프리미엄이 얼마라도 물량을 찾기 힘들다"고 전했다. 신분 노출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사채시장의 전주와 거액 재산가들의 돈이 이 비실명장기채권으로 집중되자 위조 채권까지 성행하고 있다. 지난달 중순 국민주택채권 17억원 어치를 위조한 사기단이 구속된데 이어 지난달에는 산금채 54억원 어치를 위조해 사채시장에 유통시킨 사기단이 적발되기도 했다. ◇달러 사재기, 암시장 활황=사채시장 전주들과 거액 예금주들의 또 다른 투자수단은 달러. 연말을 전후해 환율이 최소한 2,000원대 이상으로 치솟을 것이라는 악성루머가 사채시장에 공공연히 돌면서 달러사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시중은행의 개인금융 담당자는 "개인적으로 아는 전주 한사람은 만날 때 마다 1만달러씩 환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며 "이사람이 4~5개 은행을 거래한다고 하면 하루에도 4만~5만달러를 살 수 있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개인이 관광을 목적으로 달러를 살 수 있는 한도액은 1만달러. 그러나 관행적으로 은행 창구에서 여권만 제시하면 달러 매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주들은 필요한 만큼의 달러를 쉽게 사 모을 수 있다. 은행의 한 관계자도 "환전시 여권을 복사해 보관해야 하는데 창구에서 이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개인들의 달러 수요가 폭증하면서 남대문과 압구정동 일대의 암시장도 모처럼 활황세를 보이고 있다. 사채시장 관계자는 "자취를 감췄던 암달러 상인들이 최근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며 "환율이 좀 비싸긴 하지만 신분이 철저히 보장되기 때문에 이곳을 활용하는 전주들도 적지 않다"고 전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이 같은 달러 가수요 분위기를 틈타 단기차익을 노린 환투기 세력이 가세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 시중은행의 외환업무 담당자는 "개인뿐만 아니라 충분한 외화예금을 보유하고 있는 일부 기업들도 달러를 매입할 의사를 보이고 있다"며 "여기에 헷지펀드와 같은 외국계 자본까지 외환시장에 등장한다면 상황은 심각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금난 기업 급전 구할 길 없어=은행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넘쳐 나는 돈을 기업체 대출보다는 국고채 등만을 자금운용의 1순위로 삼고 있다. 또 신용금고 등 중소금융기관은 '퇴출'을 우려해 유동성 확보에만 골몰하고 있는 실정. 여기에 사채시장 전주들까지 안정성 위주의 투자처로만 몰리게 되자 자금난을 겪고 있는 일부 중견ㆍ중소기업들은 벼랑끝까지 몰리게 됐다. 사채시장에서의 할인금리는 A급의 경우 월 0.8~1.2%, B급 어음은 월 1.5~2%수준의 초 고금리. 최근에는 제도권 시장에서 급전을 구하기 힘들어 일부 부실기업들의 경우 금리를 불문하고 사채시장 자금을 빌리려고 해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사채시장 관계자들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판에 고금리라도 중소기업에 돈을 대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금융시장 관계자들도 "증시가 회복세로 돌아서고 자금시장에 만연한 불안 심리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최근 심화되는 자금 흐름의 왜곡현상이 제 모습을 찾기 힘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태준기자 입력시간 2000/11/12 18:38 ◀ 이전화면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