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여름 밤, 벤처기업 대표인 K씨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혼자 사는 아파트로 귀가했다. 현관 외벽의 `홍채 인식기`에 왼쪽 눈을 갖다대니 “어서 오십시오” 하는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문이 열렸다. 집안에 들어서자 어두웠던 실내가 은은한 조명으로 밝아지고 에어컨이 시원한 바람을 내뿜으며 주인의 귀가를 반긴다.
K씨는 사워를 하며 벽에 부착된 LCD 화면으로 TV뉴스와 음악채널을 번갈아 시청했다.
샤워를 마친 K씨는 소파에 앉아 음성인식 제어가 가능한 PDA의 전원을 켰다. K씨가 “영화감상”이라고 말하자 TV가 켜지면서 커튼이 쳐지고 어두운 조명으로 전환된다.
TV에서는 오전에 휴대폰으로 녹화지시를 했던 메이저리그 야구경기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최희섭이 타석에 등장한 순간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K씨가 다소 짜증스러워하며 수화기를 들자 TV화면은 자동으로 일시 정지됐다.
K씨의 일상생활은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다. 이른바 `홈네트워크` 기술이 실생활에 접목되기 시작하면서 따로따로 평범하게 존재했던 가전기기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여 꿈의 `디지털 홈`을 만들어가고 있다.
◇통신과 가전, 방송의 융합= 디지털홈은 통신과 가전, 방송, 건설까지 한데 융합되는 첨단기술의 집합체다.
가정내 네트워크의 서버 역할을 하는 `홈서버`만 해도 PC, 디지털TV, 콘솔게임기, 냉장고 등 다양한 후보군이 거론되고 있다. 제어용 단말기는 PDA, 휴대폰, 전용 웹패드, 스마트 디스플레이 등이 편리한 사용성을 내세워 경쟁을 하고 있다.
유선 기술로는 기존 전화선을 이용하는 홈PNA, 전기를 이용하는 전력선통신(PLC), PC 주변기기에 주로 활용돼 왔던 IEEE 1394 등이 있으며, 무선 기술에는 IEEE 802.11을 핵심으로 하는 홈RF와 무선랜, 근거리 무선통신인 블루투스 등이 경합 중이다.
이러한 개별 기기와 기술들이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내며 실제 생활에 접목돼 가고 있음을 처음 보여준 것이 삼성물산이 서울 도곡동에 지은 타워팰리스다. 이후 화곡동 대우 그랜드월드, 신도림동 대림 e편한세상 등 홈네트워크 기술이 적용된 디지털 홈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빠른 표준화로 세계시장 선점한다= 홈네트워크 기술의 본격적인 상용화와 대중화를 위해서는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 여러 기술들의 표준화를 이루는 작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가전업계와 통신, PC 업계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물줄기를 끌어오기 위해 홈네트워크 산업의 주도권 다툼을 벌여온 것도 표준화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최근 거대 글로벌 기업들이 힘을 합쳐 표준화의 길을 연 데 이어 국내 주요 업체들도 포럼을 결성해 빠른 표준화에 나서고 있어 전망이 한층 밝아졌다.
삼성전자는 지난 6월 소니,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HP, IBM, 노키아, NEC, 필립스, 후지쓰 등 전세계 가전ㆍ정보기술(IT)을 대표하는 기업들과 함께 `디지털홈 워킹그룹`(DHWG)을 결성했다. 이들이 그동안 벌였던 `신경전`을 접고 일단 DHWG의 깃발 아래 모인 것은 저마다 각개약진해 시장 혼란을 부르기보다는 인터넷 프로토콜처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마당을 만들어놓고 각자의 살 길을 모색하겠다는 전략이다.
국내에서도 `디지털홈 포럼`이 지난 22일 창립식을 갖고 공식 출범했다. 포럼 의장을 맡은 윤종록 KT 마케팅기획본부장은 “정보통신, 건설을 비롯해 모든 분야가 디지털홈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표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향후 10~20년간의 한국 경제를 이끌어 나갈 기반을 만드는데 포럼이 일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없다= 디지털홈의 미래가 청사진으로만 장식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업계는 미래 핵심 전략산업 중 하나인 디지털홈 사업에 뛰어들면서도 막상 막대한 투자를 감당할 만한 시장수요가 일어날 지 여부에 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전명표 삼성전자 부사장이 “자체조사결과 디지털홈의 70여개 항목 중 소비자들이 돈을 내겠다고 한 것은 불과 4개뿐”이라며 “잘 사용되지도 않는 서비스를 개발하면 자칫 시장을 죽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 데서 업계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무조건 `편리하다`고만 강변하며 오히려 사용하기에 복잡한 서비스를 제시할 게 아니라 사용자 입장에서 최적의 편리함을 보장할 수 있는 독창적인 패러다임, 누구나 값싸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킬러 애플리케이션`(핵심 서비스)를 만들어 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미래산업 떠받칠 기둥" 투자 잰걸음
■업체별 준비 어떻게
생활의 근거지인 `집`을 완전히 디지털 체계로 바꿔낼 홈네트워크의 응용분야는 무한하다. 디지털원격교육, 원격진료, 원격검침, 대화형 디지털TV, 주문형 비디오, 방범ㆍ방재, 개인정보 관리, 쌍방향 홈쇼핑, 홈뱅킹, 에너지 관리 등 실생활의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서비스로 무장, 미래의 전자ㆍ정보기술 산업을 떠받칠 기둥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아직은 시장이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오는 2007년에는 전세계적으로 386억달러(가전기기 제외)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KTㆍSK텔레콤ㆍ삼성전자ㆍLG전자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을 필두로 주요 통신ㆍ가전ㆍ건설업체들이 총출동해 홈네트워크 시장선점 경쟁에 나서고 있다.
KT는 초고속인터넷 등 기존 핵심사업의 정체를 극복하기 위한 `신성장 동력`으로 디지털홈을 꼽으며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지난 7월 홈오토메이션 전문업체인 코맥스와 협약을 체결, 가스밸브ㆍ출입문ㆍ보일러 등의 원격 제어, 화재ㆍ가스누출ㆍ방범 등 원격통보, 방문자 확인 및 화상전화, 전기ㆍ가스ㆍ수도 등 원격검침 서비스 등을 공동 개발키로 했다.
KT는 이들 기능을 KT 홈게이트웨이, 비디오폰과 연동시켜 비싼 비용 때문에 새로 지어지는 고급 아파트에만 적용되고 있는 홈네트워크를 대중화시킨다는 계획이다.
KTF도 최근 LG기공과 제휴해 휴대폰이나 PDA로 가정내 모든 가전기기의 상황을 파악하고 제어하는 원격제어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KTF는 이에 앞서 LG전자, 서울통신기술, 현대통신산업 등 주요 디지털홈 업체와 제휴를 맺은 바 있다.
SK텔레콤은 최근 `유비쿼터스 서비스` 업체로의 변신을 선언하며 그 핵심 기반이 될 홈네트워크 서비스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이 회사는 `홈케어`(Homecare)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휴대 단말기로 출입문ㆍ조명ㆍ가전ㆍ비디오폰ㆍ가스 등을 통제할 수 있는 홈네트워크 서비스를 제공한다.
삼성전자와 LG전자도 냉장고, 디지털TV, 전자레인지, 에어컨 등의 생활가전을 네트워크화시키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삶`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비다(vida)`를 따서 지은 `홈비타`란 브랜드의 홈네트워크 토털 솔루션을 내놓은 상황. 이 회사는 용인 수지지구의 삼성아파트 100세대와 도곡동 타워팰리스 1,500세대에 홈비타를 적용해 호평을 받았다.
LG전자는 `LG홈넷`이란 이름으로 냉장고, 디지털TV, 세탁기, 에어컨, 가스오븐레인지, 전자레인지 등 자사의 대표가전들을 묶은 홈네트워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LG텔레콤과 제휴, 가정 내에서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PCㆍ휴대폰ㆍPDA 등을 이용해 이들 가전기기와 가스ㆍ전등 등을 제어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