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일 정상이 11개월 만에 자리를 같이 했다. ‘셔틀 외교’로 따지면 지난해 6월 이후 처음이다. 9일 열린 정상 회담은 당초 상견례 수준에서 머물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북한의 전격적인 핵실험은 한ㆍ일 정상회담의 의제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정상 회담의 의제가 당초 ‘북핵 불용’이라는 선언적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던 북한 핵실험에 대한 대처 방식이 핵실험 강행에 따라 이를 수습하기 위한 대응 방안으로 전환된 것이다. 분위기도 한층 엄중해졌다. 그러나 양국 회담의 결과물을 보면 그리 탐탁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북한의 핵실험이 돌발 상황으로 발생했다고 하지만, 양국이 공동 성명이나 공동의 기자회견 등의 결과물도 없이 끝을 낸 것 자체부터 양국간 앙금과 온도차가 여전함을 느끼게 해준다. 발등에 떨어진 불인 북핵 문제와 관련해 사후 해법을 놓고는 양국간의 의견차가 여전한 것처럼 보인다. 여러 갈래로 꼬인 주변 정세를 감안해 양국이 실리를 앞세운 ‘전략적 호혜’관계를 만들어냈다고는 하지만 과거사 문제 등 다양한 함수 속에서 양국간의 관계가 진정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바뀌기까지는 시일이 필요해 보인다. ◇현실적 정세 따른 ‘실리 외교’ 채택=양국은 일단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한ㆍ일 관계 회복의 전기를 만들어냈다. 양자 회담은 지난해 11월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 중단됐고 ‘셔틀 정상외교’도 지난해 6월 서울 정상회담 후 열리지 않고 있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양국은 어떤 형식으로든 관계 복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아베 총리의 취임을 계기로 삼지 않을 경우 관계 회복 시기가 그만큼 멀어질 수 있다는데 부담을 가져왔다. 더욱이 북핵 문제가 수렁에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대립각을 세워서 좋을 것이 없다는 현실론을 앞세운 ‘실리 외교’의 필요성을 가져왔다.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등 근원적인 해법을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음에도 그나마 정상 회담 자체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도 이런 정황들 때문이다. ◇북핵 문제, ‘예방외교’에서 ‘사후 수습’으로 긴급 변경=이번 정상회담 전까지만 해도 우리 정부는 예방외교, 즉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에 몰두해 왔다. 한ㆍ일 정상회담의 의제 역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끝내 핵실험을 강행함에 따라 양국의 대화 내용도 완전히 바뀌었다. 실제로 이날 양국 정상 회담의 대부분이 북한의 핵실험 강행에 초점을 맞췄다. 이른바 ‘북핵 불용’이라는 포괄적 선언을 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깊은 우려가 나왔고 북한은 이에 대해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한다는 합의가 도출됐지만 양국의 미묘한 견해차는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핵 실험시 북한에 대한 전면적인 무역 봉쇄와 군사 조치까지 포함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재추진 등 초강경 제재 조치를 내세우고 있는 반면, 우리측은 군사적 대응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꺼려 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 일시 봉합=우리 정부는 신사참배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아베 총리 역시 일본내 보수세력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어떤 형식으로 매끄럽게 처리하느냐가 이번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또 다른 관심사였다. 정상회담 결과를 보면 아베 총리는 이 같은 역사적 부담을 ‘전략적 모호성’으로 해결해냈다고 볼 수 있다. 아베 총리로서는 내년 참의원 선거와 보수층을 고려할 때 적극적인 입장 발표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중ㆍ일 정상회담에서와 비슷한 갈래의 해법이었다. 중ㆍ일 정상회담 당시 아베 총리는 신사참배가 외교 문제화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참배 여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실제로 아베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일본 답방을 초청하고 양국간의 관계 복원을 원한 이상, 당분간 신사참배를 시도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는 실리 외교를 위해 양측 모두 부담 요인을 일시 봉합한 것에 불과할 뿐, 우리측이 원했던 ‘실질적인 행동’이 현실화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번 회담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본측에 ‘면죄부’만을 던져준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