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미쳤다.”
도발(?)적 제목의 글로 최근 워싱턴을 맹비난한 신문은 영국의 `더 타임스`다. 칼럼니스트 존 르카레의 펜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과거 매카시즘 열풍보다 더한 역사적 광란의 시기에 미국은 접어들었다. 기업들의 이해에다 언론까지 장단을 맞추며 미국의 정의는 무너지고 있다.”
다른 한 미국 전문가의 독백은 손들어 주기인지, 빈정댐인지 헷갈린다. “부시 행정부야말로 가장 `솔직`한 정권이다. 미국의 이익에 이처럼 노골적인 역대 정권이 있었는가. 카터도 클린턴도 국익과 관련해선 이중적 잣대를 가졌다.”
정신이 없는 걸까, 솔직한 걸까. 이라크 유전을 향해 진군하는 부시 정부에 던져진 질문이다.
19세기 초 제국주의는 `전제정치`와 유사한 뜻이었다. 번영의 의미로도 한때 사용됐지만 1902년 홉슨의 `제국주의론` 이래 이 용어는 자본주의에 대한 좌파의 공격 무기로 쓰였다. 레닌이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로 제국주의를 규정한 건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다.
최근 미국의 일부 우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서슴없이 `제국`으로 부르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대충 이렇다. “테러 등으로 서방을 위협하는 전 근대적 국가들에 대해 국제법과 상관없이 이들을 무력 제압하는 `방어적 제국주의` 정책을 펴야 한다.”
지난해 영국에서 제기돼 논란을 빚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제국주의`(post-modern imperialism)의 개념과 맥이 같다. 이들이 보는 세계는 `미국=선, 반미=악`, 비뚤어진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독선적 이분(二分)론이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독일과 프랑스를 향한 제국의 국방장관 로널드 럼스펠드의 최근 `늙은 유럽` 운운 발언에는 봉건시대 제후국의 오만함도 담겨 있다.
제국 세력 확장의 전위대로 나선 건 미 기업들과 일부 언론이다. 정치에도 `미국식 마케팅`은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빈 라덴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사담 후세인에게로 `절묘히` 돌려버린 여론 몰이는 미국식 마케팅의 결정판이다.
북한이 최근 아메리카 제국을 상대로 펼치는 게임은 마케팅 측면에서도 애당초 되는 승부가 아닌 듯 싶다. 쏟아지는 비난에도 핵 위협이라는 벼랑 끝 체제 유지 전술을 펼쳐 든 김정일 정권의 시점 선택은 나름대로 고심의 흔적이 있다. 천하의 골리앗이라도 양쪽 싸움은 버겁다는 것, 한반도 전쟁 발발시 치러야 할 엄청난 대가를 미국으로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계산을 그들은 했을 법 하다.
그러나 이라크 전이 유전 확보를 노린 미국의 경제 헤게모니 전쟁이라면 북한 핵 문제는 강대국간 이해가 한층 복잡하게 얽힌 안보적 성격이 짙다는 데 난이도가 높아진다. 북한 핵개발이 바로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와 직결된다는 점은 사안의 본질이다.
국가안보, 이른바 내셔널 시큐리티에 관해 미국이 얼마나 철저한지는 그들의 시스템을 좀 아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문제다. 체제 보장이 발등의 불인 북한도 북한이지만 미국내 골수 매파들에게 `신의 가호를 받는`제국의 안위는 말 그대로 `교조적` 개념이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최근 발언은 그저 흘려 들어야 할 대목이 아니다. 마냥 밀어붙일 여지도, 시간도 많지 않음은 평양이 화급히 읽어내야 할 명백한 `판세`다.
미국이 제 정신이 아닐 리 없다. 새삼 놀랄 상황도 아니다. 적어도 미국의 집권 세력이 지금 외쳐대는 전세계를 향한 패권 논리는 그들 `원래`의 모습일 뿐이다.
<홍현종(국제부장) hjho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