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했던 크메르왕조…인걸은 간데없고 ‘아름다운 폐허’만이
| 산스크리트어로 '왕도(王都)에 속한 사원'을 뜻하는 앙코르와트는 크메르왕조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검은 이끼에 덮이고 무성한 덩굴에 휘감긴 1,000년 영광의 껍질 앞에서 인간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에 젖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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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속에 서 있는 거대한 석조 건물. 자신을 살아 있는 신이라고 선언한 옛 크메르의 왕들은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 신에게 봉헌할 사원을 만들었다. 신왕(神王)이 구현한 사원들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신봉받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검은 이끼에 덮이고 무성한 덩굴에 휘감긴 영광의 껍질 앞에서 인간은 우주 자체이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야릇한 감상에 젖는다. 앙코르 유적지 여행의 묘한 매력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앙코르 유적지는 캄보디아 북서부 시엠립(Siem Reap) 외곽에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다. 동남아 대부분을 점령했던 크메르 왕조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9세기부터 15세기 초까지 600여 년에 걸쳐 여러 왕들이 지속적으로 건설한 곳이다.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사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왕도(王都)에 속한 사원’을 뜻한다. 크메르 왕조 전성기인 12세기 때 수리야바르만 2세가 건설한 힌두교 사원이다. 크메르왕조가 1431년 태국(아유타야 왕조)에 멸망한 뒤 정글 속에 묻혔던 이곳은 1860년 프랑스의 식물학자 앙리 무어의 스케치와 여행기 덕분에 유럽과 세상에 알려졌다.
외벽은 가로 1.5km, 세로 1.3km 규모인데 이는 폭 190m, 길이 5.4km에 이르는 해자(垓子ㆍ성 밖을 둘러 판 못)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는 외적 방어와 농업용 관개시설로 이용됐다고 한다. 해자 위 다리를 건너 500m 가량의 ‘참배의 길’을 지나면 눈에 익은 중심 건물에 닿는다. 사원은 크메르의 영산인 수미산을 표현했다는 65m 높이의 중앙탑, 그 사방에 하나씩 지은 작은 탑, 3중의 회랑(복도) 등으로 이뤄졌다.
모든 구조물은 일정한 규격도 아닌 석재들로 퍼즐 맞추듯 견고하게 세워져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구나 사원을 짓는 데 쓰인 사암의 재료가 나는 곳은 50km나 떨어진 곳에 있단다. “사람 26만 명과 코끼리 4만 마리가 동원돼 30여년 동안 지어졌다”는 현지인의 설명에도 쉬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회랑의 부조에서는 크메르의 내세관과 독자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천상ㆍ연옥ㆍ지옥의 모습,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수리야바르만 2세의 군대 행진 등이 긴 복도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데 인물마다 각기 표정이 다르고 손가락 마디 하나까지 정교하게 표현돼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사원 입구와 발코니 등에는 힌두교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신으로 알려진 머리 7개 달린 뱀 ‘나가’ 등의 조각 작품이 있다.
앙코르 유적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은 ‘큰 도시’란 의미의 앙코르 톰이다. 가로 세로 3km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8m 높이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앙코르 톰을 대표하는 것은 바욘 사원. 앙코르와트보다 몇 백년 후대인 자야바르만 7세 때 세워진 것으로 중심 종교가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뀐 사실을 보여준다. 사원의 중심인 불당에는 54개 탑이 있는데 탑의 4면에 ‘바욘의 미소’라 불리는 관음보살의 얼굴이 조각돼 있다. 앙코르 톰 동쪽에 있는 사원 타프롬에서는 석조 건축물을 휘감거나 타넘어간 거대한 나무뿌리를 볼 수 있다. 세월과 자연의 힘이 만들어낸 기괴한 모습이다.
앙코르 건설에 동원돼 노동에 시달렸을 백성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캄보디아인들은 국기와 화폐에 앙코르 유적지를 그려 넣을 정도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크메르의 문화, 정치, 사상의 정수라고 믿기 때문이다. 연간 200만명 넘게 찾는 외국 관광객들로부터 하루 입장료 20달러(현지인은 무료)라는 상당한 소득도 안겨준다. 모든 위대한 문화유산은 문화예술적 가치와 동시에 많은 사람의 희생을 강요한 가혹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각성의 메시지도 전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시내에서 7km 떨어진 시엠립 국제공항은 아시아나항공과 대한항공 등 매일 2편이 운행되며 건기인 11월부터 3월 사이가 여행하기 좋다. 유기농 쌈밥집 등 한국식당도 많고 북한의 ‘평양랭면’도 영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