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秘錄, 김우중신화 몰락] <4장> 잃어버린 4개월

김우중, 세번의 살 기회 있었지만…

80년대 김우중 회장의 화려한 비상을 이끈 대우 옥포조선소(왼쪽)와 90년대 세계경영의 첨병이 됐던 대우자동차 폴란드 FSO공장. 김 회장은 이들을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했고 그나마 마지막에 살 수 있는 기회마저 놓쳤다.
/서울경제 DB

[秘錄, 김우중신화 몰락] 잃어버린 4개월 김우중, 세번의 살 기회 있었지만… 김영기기자 young@sed.co.kr 관련기사 •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① 4월: 워크아웃 동의했다면 "金회장 받아들였다면 코너 몰리진 않았을것" ② 5월: 알짜회사 집착 버렸다면 대우조선 매각한다면서 노조 반발에 "없던 일" ③ 7월: 자동차 경영권 놓았다면 "車만은…" 끝까지 고집… GM, 제휴 미적미적 역사에 가정을 세운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생(生)과 사(死)가 오가는 시간, 누구나 최적의 해법을 찾으려 발버둥친다. 살기 위한 인간의 욕심, 그만큼 안타깝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그의 앞 길에는 과연 죽음을 목전에 둔 벼랑밖에 없었을까. 무책임한 발언일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적어도 그에게는 세 번의 살 기회가 있었다고. 김우중은 그날도 잠결에 허우적댔다. 절망의 늪이 생각보다 깊었다. 고락을 함께해온 총수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80년대 김우중 회장의 화려한 비상을 이끈 대우 옥포조선소(윗쪽)와 90년대 세계경영의 첨병이 됐던 대우자동차 폴란드 FSO공장. 김 회장은 이들을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했고 그나마 마지막에 살 수 있는 기회마저 놓쳤다. /서울경제 DB 패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99년 7월29일 밤. 부평 대우자동차 공장에는 두려울 만큼 짙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룹 전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리자 김우중 회장은 베이스캠프를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 이곳으로 옮긴 터. 옥포조선소 시절의 야전침대 경영은 이미 몸에 배어 있었다. 밤 늦은 시간. 강남의 한 한정식 집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벌써 와 있었다. 맏형인 김각중 경방 회장과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등 13명이 함께했다. 애써 환한 얼굴로 인사말을 건넸다. “심려를 끼쳐 죄송한 마음 그지 없습니다. 그동안 도와준 4대 그룹 회장에게 감사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되지 않으려면) 현금흐름에 신경 쓰세요. 후….” 위로의 자리였지만 곳곳에서 관료들을 성토하는 푸념이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김 회장과 사돈지간인 박정구 금호 회장이 분발을 다짐하는 폭탄주를 돌렸다. 모처럼 마시는 술, 금세 취기가 올랐지만 머리는 더욱 지끈거렸다. (석진강 변호사는 미국 포천지와의 인터뷰에서 김 회장이 자살까지 생각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몰락. 99년 8월26일자로 대우의 ‘사형’은 집행됐다. 김 회장은 워크아웃 돌입과 함께 해외로 떠났다. 몇 달 동안 아프리카와 유럽을 전전했다. 회장직 사퇴 압력을 견뎌보려 했다. 판세는 두 달도 못 가 판가름 났다. 실사 결과 드러난 12개 계열사의 자본 잠식액은 무려 25조6,000억원. 채무 재조정해야 할 금액은 31조2,000억원에 달했다. ‘세계경영’을 믿고 빌려준 돈은 쓰레기가 된 채 허공으로 날라갔다. 당시 시중은행장 A씨의 회고. “뚜껑을 열어본 대우의 모습은 암이 몸 전체로 전이된 환자나 다를 바 없었어요. 워크아웃이 늦어져 추가로 투입된 혈세만 해도 족히 10조원은 넘었을 텐데, 그것 참.” 희생양이 필요했다. 당시 정부측 인사의 증언.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요. 손실규모가 웬만해야지. 국민의 분노를 어떻게 잠재우겠습니까.” 실패한 경영에 대한 죄는 있지만 잘못된 정책에 대한 실패를 묻기는 힘든 법. 타깃은 대우 경영진으로 향했다. 실사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10월 중순부터 사퇴 압력이 몰려왔다. “6개사의 경영권은 내 것”이라며 끝까지 버티던 김 회장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외에 체류한 채 전화를 통해 짧은 사의를 표시해왔다. 경영진의 일괄 퇴진 시기가 정해진 것은 11월1일. 채권단의 손실규모가 확정된 날과 일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우와 함께 대우맨들 역시 하릴없이 흩어졌다. 역사를 공부하면서의 금기가 바로 ‘만약에’다. 하지만 한 번 두고 난 바둑판이라도 복기(復碁)는 가능할 것이다. 김 회장은 과연 살 방萱?없었을까. 99년 4~8월. 대우가 사실상 사형을 ‘언도’받은 시점부터 ‘집행’까지의 시기다. 이 기간 김 회장은 기적적으로 살아날 기회가 있었다. “관료들의 ‘장난’ 때문에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는 극단적이고 일방적이다. 당시 워크아웃 집행과정에 참여했던 전직 시중은행장의 회고는 이런 점에서 쓴 뒷맛을 남긴다. “4월 이후에도 김 회장에게는 적어도 세 번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경영권에 대한 미련이 끝까지 그 사람(김우중)에게 따라다逆윱求? 특히 자동차에 집착이 많았죠. GM이 괜히 나서 그 사람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인지. 어찌 됐든 생즉사(生則死)의 논리는 바로 김 전 회장을 두고 하는 말같습니다.” 그의 발언은 김 회장이 해외 도피 당시 밝힌 ‘자신의 치명적 오판’ 부분에서 뒷받침된다. “나의 최대 실수는 야심이 너무 컸다는 점이겠지요. 특히 자동차 부문은 저도 인정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하려했던 같은 후회도 들고. ” (포천지 인터뷰) 대우 워크아웃 다음날인 8월27일.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사석에서 워크아웃이 대우와의 오랜 힘겨루기 끝에 나온 ‘전과(戰果)’라는 점을 과시하듯 “올 들어 처음 발을 뻗고 잤다”고 말했다.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뒤의 말이었다. “4월 대우의 자금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워크아웃을 추진하려 했지만 대우측 반발이 심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김 회장이 받아들였다면 그렇게까지 코너에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랬다. 적어도 4월 워크아웃은 대우그룹의 완전한 해체와 김 회장의 철저한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꼬리를 자를 줄 모르는 도마뱀’이었다. 당시 대우 계열사에 몸담았던 K임원의 회고. “회장께서 대우차 등 6개를 제외한 나머지를 일찍 포기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 그에게 찾아온 첫번째 기회는 이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번째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6월30일 자동차 빅딜이 무산됐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김 회장에게는 ‘비참한 최후’를 막을 기회가 있었다. 열쇠는 4월19일의 자구안. 스스로 밝힌 계획을 속전속결로 헤치우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그러지 못했다. 4월29일. 옥포 대우중공업(조선). 노조의 저항은 극렬했다. 19일 매각방침이 발표된 데 따른 반발이었다. 경영진은 농성을 기다렸다는 듯 입장을 바꿨다. “일본기업과 50%의 지분으로 별도 회사를 만들어 이 회사에 조선 부문을 매각한 뒤 계열 분리하겠다. 경영권도 계속 보유하겠다.” “일본에 매각해 50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하고 경영권도 넘길 계획”이라던 열흘 전 김 회장의 발표는 ‘허울 좋은 공약’이 됐다. 김 회장은 간담회에서 “대우조선은 애초 매각이 아니라 합작을 통한 일본자금 유치가 기본 전략이었다”고 밝혔다. ‘경영권’에 대한 미련이 읽히는 대목이다. 경영권에 대한 의욕은 5월까지 이어졌다. 사회 분위기도 최면을 불어넣었다. 주식시장이 폭등하자 하숙비를 털어 투자하는 대학생까지 나타났다. 거품경제는 환부를 더욱 곪게 했다. 5월12일 구미 대우전자 공장. 대우는 42인치 PDP TV 신제품을 발표했다. 빅딜로 전자를 삼성에 내주겠다면서도 신제품 개발은 계속됐다. 김 회장은 이것도 저것도 갖겠다는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두번째 기회는 이렇게 사라져갔다. 한 번 놓친 기회는 상황을 더욱 꼬이게 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미 워크아웃에 대비한 도상 연습이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국정원장의 교체와 대통령의 외면, 대우에 대한 압박의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김 회장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의 시간을 역류해갔다. 밀려오는 워크아웃 압박, 급기야 5월 중순 김 회장은 이에 맞서 법정관리라는 벼랑 끝 카드까지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뻥카드’였겠지만. 오호근 위원장의 해석. “법정관리를 진짜 하겠다는 게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검토한 것뿐일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아둔하게 법정관리를 넣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소식은 청와대에까지 들어갔다. 갈등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김 회장이 살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는 6월30일 빅딜 무산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패망의 그늘이 드리워진 7월. 세번째 기회는 이때 찾아왔다. 이헌재는 김 회장과의 최종 담판 끝에 마지막 기회를 줬다. 자동차 등 6개사 정상화 작업을 김 회장에게 맡겼다. “핵심 12개사 중 6개는 채권단에 맡기고 나머지만 처리하시지요. 서두르지 않으면 워크아웃에 들어가거나 법정관리에 들어갑니다.” GM과의 제휴협상은 김 회장이 최후로 가진 카드였다. 시계추를 1년 전으로 돌려 98년 5월1일. GM과의 제휴협상을 진행 중이던 김 회장은 영국 현지에서 “GM에 지분의 35%를 넘겨줄 계획이다. 결과에 따라 50%를 넘겨줄 수 있다”고 말했다. ‘경영권’만은 지키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계경영의 최첨병으로 품에 안고 싶었던 자동차 경영권, 그에 대한 욕구는 몰락의 순간까지 이어졌다. 99년 8월5일 서울역 대우센터. 김태구 대우차 사장과 GM코리아의 앨런 패리튼 사장은 이날 전략적 제휴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하지만 MOU가 ‘의미 없는 약속’에 불과하다는 점이 알려지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11일 로이터통신을 통해 전해진 잭 스미스 GM 회장의 인터뷰. “아무래도 협상이 성사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요. 타결이 곧 이뤄지지는 않다고 봐야 합니다.” 8월16일 김태구 사장이 다시 디트로이트를 찾았다. 스미스에게 마지막 구원신호를 보냈다. 워크아웃을 최대한 늦출 수 있는 것은 GM의 도움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진 상황이었다. 오호근 위원장은 “워크아웃에 들어간 후 10월에 GM과의 협상 진행과정을 알아봤지만 1월과 변한 게 없었다”고 회고했다. 대우차에 대한 끝없는 미련은 이렇게 그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기회마저 앗아갔다. 김 회장이 워크아웃과 함께 깨끗이 경영권을 내놓고 점퍼를 걸친 채 노조를 달랬으면 어떠했을까. 신화를 만든 ‘인간 김우중’의 모습은 화려하게 남지 않았을까. 입력시간 : 2005/06/16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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