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11일] 노몬한 사건

1939년 5월11일 만몽(滿蒙) 국경. 외몽골 기병대가 군마의 목초지를 찾아 개울을 건넜다. 영토 침범으로 간주한 만주국은 일본에 일러바쳤다. 일본 관동군은 몽골군을 손쉽게 쫓아냈지만 끝이 아니었다. 몽골과의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소련군이 반격에 나선 것.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노몬한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노몬한은 소련과 일본의 위성국이던 외몽골과 만주국간 영토분쟁 지역. 애들 싸움에서 번진 어른 싸움의 개전 초 하늘을 찌르던 관동군의 기세를 꺾은 것은 소련의 기갑전력. 탱크 498대, 장갑차량 346대를 포함해 각종 차량 1만여대를 갖춘 5만명의 소련군이 탱크 87대뿐인 3만여 일본군을 덮쳤다. 장비의 성능도 소련제가 훨씬 뛰어났다. 열세에 처한 일본군의 선택은 육탄돌격. 한국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굳어져가는 화염병이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탄약이 떨어지자 장갑차에 총검술로 맞섰던 일본군은 결국 퇴각하고 외교적으로 사태를 진정시켰다. 9월 정전협정 체결. 소련이 원하는 대로 국경선이 그어졌다. 일본군은 절반이 죽거나 다쳤다. 소련의 완벽한 승리였다. 노몬한 전쟁의 승리는 소련국민들을 러일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영웅도 탄생시켰다. 훗날 독일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코프 원수가 총사령관에 발탁된 것도 노몬한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던 전공 덕분이다. 노몬한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면 히틀러의 희망대로 독일과 일본이 양쪽에서 소련을 치는 구도가 성립될 수도 있었다. 군인을 양성하고 탱크를 만든 것은 돈. 노몬한 전쟁 당시 소련의 국내총생산(GDPㆍ현재가치 환산)은 366억달러, 일본은 184억달러였다. 총성이 울리기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돼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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