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데스크칼럼] '민중영합'의 조짐을 경계한다

柳晳基(정경부장)요즘 정부의 경제정책 행보가 매우 이상하다. 하는 일마다 대충 덮으려고 서두르다 실책을 남발하고 있다. 「민심 수습」이라는 괴상한 구호를 앞세워 지난 1년반동안 애써 지켜온 경제운용의 원칙을 마구 흔들고 있다. 흡사 지금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을 받는 비상시국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한 모습이다. 더욱이 새 경제팀은 경제운용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그저 맞장구를 치거나 수수방관하고 있다. 강봉균 재경부장관은 지난 6월3일 취임후 첫 기자회견에서 『경기부양을 위한 추가활성화 대책이나 추경예산 편성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실물경기 회복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거품 소지를 우려하던 경제관계자들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반색했었다. 그런데 고급옷 로비의혹,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이 불거지고 법무장관이 전격 경질되면서 사정은 완전히 바뀌었다. 경제팀의 수장격인 康재경장관이 추경 불가를 밝힌 다음날인 4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여당 주례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경제회복으로 늘어난 세계잉여금이 중산층·서민에 돌아가도록 대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다. 뭔가 크게 달라진 메시지였다. 올들어 金대통령은 기회있을 때마다 아랫목의 훈기가 점차 윗목으로 퍼지고 있으나, 작은 성과에 만족해 개혁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된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대통령의 이날 지시는 중산층·서민 생활안정대책으로 구체화돼 국민 1인당 22만원꼴로 근로소득세가 감면되고 2차 추경예산이 추진됐다. 金대통령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대국민 사과 발언을 한 뒤 『중산층 서민이 그동안 고통을 분담했으니 과실도 같이 나누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중산층·서민 지원의지는 국정 책임자로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사안이다. 문제는 아직도 우리 경제가 IMF 구제금융을 받고있는 위기상황이며 벌써 「과실」을 거론할 시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외환위기이후 우리 경제는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 올 연말 국가채무가 1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재정적자를 줄이려면 정부가 돈을 덜 쓰거나 세금을 더 거둬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이번에 1인당 22만원씩 세금을 깎아준 결과 2조5,000억원이 덜 걷힌다. 만약 정부가 세금 2조5,000억원을 더 거둬들이기 위해 세목을 신설하거나 세율을 인상한다면 엄청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재정적자 상황에서 세금을 깎아 준 것은 잠깐 기분이 괜찮을 뿐 곧 잊혀질 「선심행정」일 뿐이다. 이같은 선심이 한번 시작되면 뒷감당이야 어찌됐건 너도나도 손을 벌리고 나선다. 중산층 지원대책이 발표되기 무섭게 정부 일각에서 공무원 사기진작책을 들고나왔다. 본봉의 250%인 체력단련비가 폐지돼 공무원 생계에 지장이 많다는 것이다. 민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임금인 공무원들이 임금감축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공무원급여 현실화는 정부가 약속한 공공개혁이 충분히 이뤄졌다는 국민적 합의가 선행돼야 가능하다. 2차에 걸친 정부조직 개편을 벌였지만 「작고 강한 정부」가 정착됐다는 얘기는 듣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경조비 전면금지의 실수를 저지른 정부는 무려 2조5,000억원이 드는 체력단련비 부활을 허겁지겁 수용하고 말았다. 회사가 망하거나 구조조정의 칼을 맞고 쫓겨난 100만명이상의 IMF 실직자들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다. 金대통령의 방미를 맞아 경제팀은 연거푸 무리수를 두고 있다. 6개월이나 끌어온 자동차 빅딜을 포기하는 대신 총수의 사재출연을 미끼로 생명보험사 상장을 허용하는 특혜를 시도하다가 여론의 포화를 받았다. 삼성자동차 처리방식에 대해 부산지역 여론이 나빠지자 법정관리 여부에 관계없이 부산공장은 정상가동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다. 지난해이후 우리 경제는 IMF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쟁력이 떨어진 기업이나 은행·증권회사를 거침없이 폐쇄·정리했고,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 불가피성에 수긍해 왔다. 그런데 수조원의 부실이 누적돼 회생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난 삼성차 부산공장은 어떤 이유로 「부실=정리」라는 원칙에서 예외가 돼야 하나. 지역정서를 내세우는 삼성차 가동 요구가 2년전 기아자동차 처리때와 달라진 점이 거의 없다.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이 기아차에 발목잡힌 것과 똑같은 논리로 이번엔 국민회의·자민련이 삼성자동차의 볼모가 된 것이다. 지금 우리 경제가 IMF상황인데도 말이다. 한번 자신감을 잃으면 원칙을 지키기 힘들어진다. 하나의 미봉책은 또다른 미봉책을 재생산한다. 멕시코·브라질 등 남미국가들이 상습적으로 환란에 시달리는 원인으로는 공공개혁 부진, 재정적자 누증, 가벌(家閥)개혁 부진, 민중영합 등 정치논리 기승, 뿌리깊은 부정부패 등이 꼽힌다. 멕시코는 지난 76,82,87,94년 네차례나 외환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멕시코 환란의 발생 시기는 4년마다 한번 진행된 대통령 선거의 해와 거의 일치한다. 멕시코정부는 IMF와의 약속을 어기고 공무원 임금인상 등 공공지출 증가를 시도하다 자금지원이 끊겨 다시 환란을 당하는 시행착오를 되풀이 했다. 지난 97년 대선에서 우리나라는 50년만에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그러나 바로 그 대선이 있기 2주일전에 우리나라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었다. 우리는 벌써 이를 잊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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