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211> 밀담인 듯 밀담 아닌 여야 대표 회동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꼭 남녀 간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비록 그 절차가 100% 민주적이지 않더라도 ‘공익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결단이 남 몰래 전격적으로 이뤄진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리가 기억할 만한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서도 대부분 밤이 이슥한 시각에 소수가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밀담식 논의’를 바탕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밀담’이 역사적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 조건의 충족이 필요하다. 우선 그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세를 주도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그들만의 소통 체계를 통해 만들어진 논의가 충분히 파급효과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명분과 의미다. 다른 사람들이 결과를 받아들일 만큼 타당하고 그에 맞게 방향 설정이 분명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밀담이 우리 역사에도 있었다. 이를테면 7·4 남북 공동 성명을 위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을 방문한 것이나 김대중 정부 당시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것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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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끼리 왜 만났니’라는 소리나 듣게 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밀담이다. 상당수 정보와 의견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는 요즘 세상에 주요 의사결정자들이 몰래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유쾌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특히 정치인들 간의 밀담일수록 여론의 뭇매를 맞기 마련이다. 우리 국민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따르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민주적이지 못했던 우리 정계의 모습을 보기에 이미 지칠대로 지쳤다. 얼마 전 종영했던 ‘어셈블리’라는 드라마에도 정치에 대한 이런 염증이 녹아있다. 작중 인물인 진상필 의원(정재영 분)은 의원들끼리 나눈 밀담과 거래에 의한 의사결정을 참지 못하고 “국민을 위해서만 권력을 행사하라”고 일갈했다. 또한 주류들의 비밀과 이해관계와 같은 것들을 낱낱이 밝혀내고 진정한 민주주의는 투명한 정보 공유에 의한 것이라는 믿음을 실천하기도 했다. 물론 진상필의 행동은 지나친 이상주의일 수 있다. 현실 권력 지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설정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동안 우리 정계를 지배해 왔던 부적절한 밀담의 결과들을 되돌아보게끔 하는 드라마 내용이었음은 틀림없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회동이 ‘밀담’이란 오해를 사고 있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이었던 9월 28일 두 대표는 부산 서면 롯데호텔에서 ‘전격 단독 회동’을 가졌다. 여야 대표가 만나 큰 틀에서 ‘합의’를 시작한 것이다. 주된 안건은 ‘안심 번호를 이용한 국민공천제 도입’이었다. 암호화된 일회용 번호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후보를 정하기 때문에 여론 조작 가능성을 방지하는 시스템 도입을 검토한 것이다. 여야 대표는 ‘상당한 의견의 접근을 이루었다’는 에두른 표현을 통해 국민 여론을 의식하고 있음과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대화가 ‘밀담’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주려는듯 양자 토의 후 그 결과를 미디어를 통해 공개했다. 두 대표의 회담은 이렇듯 잠정 합의된 내용을 외부에 공표했으니 밀담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밀담인 듯 밀담 아닌, 밀담 같은 회동’인 셈이다.

하지만 ‘문-무(문재인-김무성) 회동’으로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특히 여권에서는 ‘박-무(박근혜-김무성) 전쟁’으로의 비화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출국 중에 이런 회동을 한 것 자체가 벌집을 건드린 것이나 다름없다. 김무성 대표는 “오해가 있어서 한 말씀 드린다. 오늘 양당 대표가 만나서 합의를 본건 아닙니다”라고 부랴부랴 해명에 나섰지만 불 끄기가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활은 시위를 떠났다. ‘문-무 회동’에 앞서 두 대표가 대세를 주도할 영향력을 갖췄는지 스스로 따져보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상향식 공천은 국민 다수가 바란다는 점에서 협상의 결과엔 분명코 명분이 있다.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힌 경우 ‘밀담’이 있었다는 사실이 정당화되려면, 그 명분만큼은 사회에 긍정적인 방향이어야만 한다. 이번 여야 대표 간 협의도 그런 생산적인 지향점을 갖는 ‘대화의 장’이었기를 바란다.


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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