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서울모터쇼는 과거로도 달려가는 이색적인 「자동차역사관」을 마련해 눈길을 끈다. 앞만보고 달려왔지만 이제는 한번쯤 뒤도 돌아보겠다는 취지다.3층 전시장에는 1900년대 초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 생산됐거나 운행된 국내차와 외제차 35개 차종을 전시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 자동차산업이 걸어올 길과 모터쇼에 나오는 올드 카(OLD CAR)를 화보로 살펴본다.
◇우리 자동차 이렇게 달려왔다
국내에 첫 자동차가 도입된 것은 1903년. 고종황제가 즉위 40주년을 맞아 외국공관을 통해서 미국에서 생산된 4기통 캐딜락 한대를 수입했다. 하지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한국인이 없어 일본 사람이 운전을 했다.
한국인으로 운전사 자격을 첫 획득한 사람은 이용문이라는 갑부로 1914년에 취득한 걸로 돼 있다. 당시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기술로 여겨져 운전사라는 이름도 운전관이라 불려졌다. 운전관의 당시 한달 수입은 약 100엔(1920년경). 쌀 한가마니 값이 5엔이니 한달봉급이 쌀 20가마. 현 쌀값으로 따져도 200만원이 넘는다.
쌀이 귀할 때이니 대단한 봉급을 받는 상류층이었다. 나비넥타이에 베레모를 쓰고 흰색장갑을 끼고 운전해 현재의 인기탤런트에 비견될 생활을 했다고 자동차역사는 전하고 있다.
택시를 대절하는데는 시간당 6엔이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쌀 1.2가마, 지금 돈으로 약 15만원 정도니 비싼 행차비다. 고급차의 경우 쌀 4,000가마에 살 수 있었다. 현재 가격으로 약 5억원에 해당된다.
해방 후 국내에 소형버스, 즉 승합차가 들어왔지만 말이 끌었다는 기록이 있다. 크락숀이 없어 마부가 나팔을 불면서 서울 거리를 누볐다. 해방 후인 1945년 승용차와 버스, 화물차를 합해 국내에 등록돼 있는 차량은 모두 7,386대에 불과했다.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군용차가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49년에는 1만6,431대로 5년간에 123%가 늘어났다. 해방후 10년이 지난 1955년 8월 서울 창경원. 국산장려회 주최로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는 국내 최초의 조립자동차인 「시발」이 출품돼 대통령상을 받았다.
말이 국산 조립차지 엔진은 미군 지프의 엔진을 개조해 얹었고 차체는 드럼통이나 철판을 두드려 만들었다.
시발차는 거의 택시로 팔려나갔는데 택시가 부족할 때니 없어서 못팔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1957년 이승만대통령은 자동차가 늘어나자 석유파동을 우려해 5.8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57년 5월 8일자의 전국 자동차수를 넘지 못한다는 조치다.
폐차가 되기 전에는 자동차를 증차하지 못하니 이미 영업 중인 택시업자는 수지를 맞았다. 손님이 탔는데도 딴 손님을 태우는 소위 합승제도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묘한 제도다.
1962년 5.16혁명직후 혁명정부는 자동차공업보호법을 제정하게 되는데 상공부(현 산업자원부) 공무원중 자동차에 관한 지식을 갖춘 인물이 없었다. 결국 일본 자동차회사의 카달로그를 구입해 참고하게 되는데 『우리회사 자동차는 승차감이 좋다』는 문구가 있었다. 결국 우리 자동차공업보호법 1조 문구는 다음과 같은 문안으로 작성됐다.
『자동차는 승차감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안전해야 한다』 자기 회사 제품을 선전하기 위해 사용하는 「승차감」이란 용어가 공업육성법에 나오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한다. 다른 조문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져 당시 화제거리였다고 오원철 당시 상공부 공업국 화학과장은 회고하고 있다.
천막만 치고 노천 등 아무데서나 자동차를 만들던 업체가 150개에 달하던 시절이다. 1962년 이 법에 의거 최종적으로 서울의 시발자동차, 하동환자동차, 부산의 신진공업사, 광주의 광주자동차제작소 등 7개의 조립공장이 허가가 났다. 새나라자동차는 63년 정부의 특혜를 받으며 생겨나 일본 닛산과 기술제휴를 맺고 닛산자동차의 「블루버드」를 부품덩어리(SKD)로 들여와 생산을 시작했다. 65년에는 아세아자동차가 설립됐고 67년에는 현대자동차가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었다. 『건설업은 외상때문에 못해먹겠어. 자동차는 현금장사니 자동차를 해야겠어』당시 건설업자로 이름을 날리던 정주영 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자동차를 현금으로만 팔고 살 때 였다.
61년부터 자전거와 오토바이, 3륜차 등을 생산해오던 기아도 『바퀴하나를 더 달겠다』며 70년 자동차사업에 참여했다. 국산엔진을 장착한 차를 「국산차」로 규정한다면 최초의 국산차는 74년에 나온 기아의 「브리사」의 몫이다. 하지만 국내 첫 고유모델의 영예는 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모터쇼에 출품된 「포니」가 차지했다. 스타일링은 이탈리아 유명 차 디자이너 주지아로에 위탁해 제작했고 엔진은 일본 미쓰비시 엔진을 개조해 얹었지만 포니는 세계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고유모델을 가진 국가로 한국이 랭크되도록 해주었다. 독자개발한 만큼 수출제한도 없었고 내수시장에서는 출고 첫해인 76년 국내승용차시장의 43%를 점하며 승용차시장을 석권, 승용차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불과 25년전의 일이다.
그리고 1999년. 국내 자동차보유대수가 1,047만대(98년말 기준)를 넘어섰다. 그것도 대부분 국산차로 채워진 것이다. IMF타격으로 지난해 8위(218만3,000대 생산)로 주저앉고 말았지만 국내자동차산업은 지난 97년까지 세계 5위의 생산대국에 랭크됐다. 93년~97년까지 매년 국내시장에서는 140만150만대의 자동차가 팔려나갔다.
운전관이란 존칭이 없어지더니 운전사로 격하되더니 운전수로 변해 별볼일 없는 직업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다시 격상돼 운전기사로 회복됐다. 『우리자동차산업이 오늘에 까지 이른 것은 기적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는 관계자들의 평가다. /정승량 기자SCHUNG@SED.CO.KR
◇화보 ◇국내 최초의 조립차인 「시발자동차」(1955). 63년까지 3,000여대가 생산됐다.
◇신진자동차의 「퍼블리카」(1967). 2기통 790CC로 국내 최초의 경차인 셈이다. 71년까지 2,005대 생산.
◇아시아자동차의 「피아트124」(1970). 이탈리아 피아트의 기술제휴로 73년까지 아시아자동차가 생산한 마지막 승용차. 6,775대가 만들어졌으며 아시아는 이후 승용차사업에서 손을 뗐다.
◇GM자동차코리아의 「시보레1700」(1972). 신진과 미국GM이 합작회사로 대우자동차 전신인 GM코리아가 75년까지 생산. 튼튼하고 힘이 강했지만 유류파동 당시 연비가 낮아 실패작으로 운명을 마쳤다.
◇새한자동차의 「제미니」(1977). 4기통 1,492CC로 81년까지 1만8,900대가 생산됐다.
◇미국 윌리스오버랜드社의 「M-38」(1941). 2차 세계대전 당시 등장해 군용차로 활동했으며 국내에는 6.25전쟁 때 미군이 들여왔다.
◇미국 GM의 「캐딜락 플리트우드 75 리무진」(1969). 캐딜락은 1701년 미국 디트로이트를 발견한 프랑스 탐험가 앙트완느 드 모드 캐딜락장군의 이름을 딴 것.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식승용차와 동일 모델.
◇러시아 볼가자동차社의 「자츠」. 국내 유일의 러시아자동차로 1990년 롯데에서 개최된 러시아 상품전시회 때 한국에 첫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