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협회들은 최근 부산 국제금융연수원 설립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김정훈 국회 정무위원장이 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아 부산 국제금융연수원을 짓는 방안을 논의 중인데 자금을 협회에서 대야 하기 때문이다. 은행연합회와 생명보험협회ㆍ금융투자협회 등 5개 금융협회들이 위원회에 참여 중인데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금융당국이 총대를 메고 전방위적으로 나서고 있어 금융협회들은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 금융협회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과거에 금융연수원 부산지원을 운영했는데 도저히 지속 가능하지 않았고 부산까지 가서 연수를 받을 이유가 있느냐"며 "게다가 왜 이런 문제에까지 금융당국이 나서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관'이 정치인의 민원 해결 창구로 전락한 셈이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정치화다. 금융은 돈을 다루기 때문에 정치가 개입하면 시장이 뒤틀리는 큰 부작용을 낳는다. 금융산업이 앞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수십년간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은 정책과 금융권 인사에 정치금융의 똬리를 틀고 있는 탓이다.
◇봇물 터지는 정치적 요구=부산 국제금융연수원 문제는 선박금융공사와 STX 등으로 대변되는 부산 지역 금융 현안과 같은 맥락이다. 지역에서는 대통령 공약사항이라는 것과 부산을 제2의 금융중심지로 하기 위해서는 금융연수원 설립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내세운다. 경제논리만 갖고 접근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치적인 배경을 가진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에는 금융권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와 직결되는 지역 민심을 과도하게 의식하다 보니 중장기적인 논의와 토론을 거치기보다 밀어붙이기식으로 이뤄지는 것도 문제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균형 발전도 의미 있지만 이번 정부 들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금융정책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금융지주 민영화도 지역 민심이라는 커다란 산이 도사리고 있다. 광주와 경남은행 매각에 지역 정서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남 지역에서는 부산과 대구은행의 인수를, 광주는 전북은행으로의 피인수를 극렬 반대하고 있다. 정부가 주인으로 있으면서 정체된 우리금융그룹과 계열사들을 최대한 빨리 민영화해 경쟁력을 갖게 해줘야 하지만 이 같은 금융논리는 묻히고 있다. 국회도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해 어느 지역에서라도 불만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 관심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국회의원 등 정치권과 청와대를 통한 정치금융은 관치금융 덕택에 가능하다. 금융감독당국이 금융회사를 쥐락펴락하니 감독당국만 잡으면 금융사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국회의 입법권이 세지면서 정부도 국회의 도움 없이는 법률안 제ㆍ개정 같은 일 처리가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국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누가 더 센 줄이냐…점입가경 인사=정부가 지분을 가진 기관들의 고위직 인사는 누가 정치권 등에 더 센 줄이 있는지를 경합하는 시합 수준이라는 게 금융권의 시각이다. 상당수 금융공공기관과 국책금융기관의 인사는 능력에 품성에 따라 이뤄지지만 뒤로는 각종 연줄을 동원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주요 금융지주 회장부터 은행 본부장까지 외부 도움을 얻는 경우가 많다. 우리금융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계열사 대표 인사 때 한 곳은 외부에서 청탁이 너무 많이 들어와 인사권자가 난감해했을 정도"라고 했다. 예금보험공사가 대주주인 우리금융은 줄 대기 인사로 말이 많았던 곳으로 이팔성 전 회장과 이순우 회장이 "인사 관련 외부 청탁을 하지 마라"는 취지의 말을 공식적으로 해야 했을 정도다.
국책은행도 사정은 비슷하다. 고위직 인사 때마다 "국회의원 A씨 라인"이라든지 "청와대 B씨의 힘"이라는 뒷말이 무성하다. 정부 지분은 없지만 상대적으로 외풍을 많이 타는 KB금융그룹도 임영록 회장 취임 이후 있었던 계열사 인사를 두고 내부에서는 '별들의 대리전쟁'으로 불렀다. KB금융의 경우 연임을 노린 강정원 전 행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선거 외곽조직이었던 선진국민연대 출신을 대거 영업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선진연대 출신인 조재목씨는 아직도 KB금융지주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KB국민카드도 이달 초 윤진식 새누리당 의원의 보좌관 출신인 조상훈씨를 상무로 영입했다.
외부 힘을 빌린 사람이 고위직에 가게 되면 아무래도 내부 업무보다 외부 일에 신경 쓰는 일이 많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내부적으로도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밖에 줄을 대는 것이 더 빠른 길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직원들에게 심어줄 수 있다는 비판이 있다. 시중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최고경영자(CEO)는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하겠지만 자회사 임원까지 외부 힘을 빌려 되는 것은 조직을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일"이라며 "인사가 만사인데 부족한 인물을 경영진으로 쓰게 됨으로써 얻는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