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30일] 1381년 영국 농민반란


1381년 5월30일 영국 켄트. 농민반란의 불길이 솟았다. 원인은 세금.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으로 재정이 궁핍해지자 14세 이상 남녀에게 1인당 1실링의 인두세를 부과한 게 배경이다. 가혹하게 세금을 짜내던 징세관 하나가 어린 소녀의 처녀성을 검사한 후 성인으로 판정, 세금을 매기자 누적된 불만이 터졌다. 농민군에는 자영농과 성직자도 따라붙었다. 특히 흑사병이 휩쓴 후 인구감소로 임금이 뛰자 귀족이 지배하는 의회가 임금억제를 위해 제정한 ‘노동자조례(1351년)’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던 도시 빈민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순식간에 10만여명으로 불어난 반란군의 깃발은 잉글랜드 전역의 3분의2를 덮었다. 사기 충천한 반란군은 6월13일 런던에 진입했다. 국왕을 알현한 농민들의 요구는 ‘농노제 폐지와 토지 분배, 인두세를 추진한 간신배 척결’. 왕은 농노해방헌장을 내렸다. 목적을 달성한 농민군 일부가 고향으로 내려가는 순간, 왕과 귀족들은 농민군 대표 와트 타일러를 면담장에서 죽여버렸다. 구심점을 잃은 농민군은 지리멸렬, 반란은 끝났다. 농민에 대한 국왕의 모든 약속도 없던 일로 되돌아갔다. 농민반란은 실패했어도 중세 장원제도의 해체와 자영농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농민과 런던시의 문을 열어준 도시노동자의 연합을 ‘최초의 노농(勞農) 소비에트’로 보는 시각도 있다. 와트와 함께 반란을 이끌다 처형 당한 사제 출신의 존 볼은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길쌈하던 시절, 누가 신사고 누가 농노였나.’ 기원전 209년 중국 진나라의 진승과 오광, 고려시대 노비였던 만적이 외친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더냐(王侯將相 寧有種乎)’와 같은 맥락이다. 요즘 세상은 어떨까. 이 땅의 인간은 평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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