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지난 1990년 통일을 이루기 전 서독 정부는 통일 비용으로 1조마르크(약 475조원)을 예상했다. 하지만 이 예상은 빗나갔다.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을 포함해 2조마르크 이상이 독일의 통일 비용으로 투입됐다. 이로 인해 독일은 통일 이후 10년이 넘도록 경제성장이 정체되는 등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통일로 인한 독일의 경제적 고통을 목격한 우리나라 정부는 1990년대 중반 국책연구기관을 통해 한반도 통일 비용을 산출하도록 했다. 결과는 기관마다 달랐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재정지원과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포함해 850억~2,400억달러(76조~216조원)가 필요한 것으로 분석했고 대통령자문기구인 정책기회위원회는 사회간접자본 확충, 북한 주민에 대한 생계보조, 민간기업의 투자까지 합쳐 약 4,400억~1조2,000억달러(396조~1,080조원)로 추산했다. 해외 연구기관의 분석은 이것과도 큰 격차를 보였다. 마커스 놀랜드 미국 국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1996년 “10년간 1조5,000억달러(1,350조원)를 북한에 집중 투자해도 25년이 지나야 북한이 한국의 60% 정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록 통일 비용의 구체적인 액수는 달랐지만 천문학적 자금이 소요될 것이라는 데는 일치했다. 이 때문에 통일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는 등 우리 사회 내부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왔다. 하지만 남북이 대치상태에 있을 경우 유발되는 군비 등 ‘분단 비용’의 부담이 상당한 점을 감안하면 남북한 관계개선과 경협을 기반으로 북한이 개혁ㆍ개방을 통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만일 북한이 스스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붕괴될 경우 우리나라가 부담해야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남북관계를 단순히 긴장완화 차원이 아니라 통일까지 내다보며 긴 안목에서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면에서 차기 정부는 통일 대비라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출발하게 된다. ◇“대북지원 통한 자체 경제성장 모색해야”=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회의에 참석해 “통일로 인한 재정위험과 관련해 남한은 독일의 사례보다는 내부적 발전과정을 통해 독자적으로 시장경제체제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체코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자력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져야 통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 전문가들 역시 북한 내부 발전을 통한 비용 감축에 동의한다. 박순성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분단 비용을 낮춰주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대북지원을 손해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물론 북한의 체제가 빠른 속도로 전환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경제적 지원 역시 남한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권 부총리는 “소요되는 추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이 주요 국제금융기구에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하기 이전 단계에서 일종의 잠정적 외자도입 방안으로 다자간 국제협력을 매개로 한 ‘북한재건기금(특별신탁기금)’ 조성이 요구된다”며 “대북지원 국제 컨소시엄으로 ‘다자 간 원조조정그룹’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반도 비핵화 전제돼야”=남북경협을 통한 대북지원과 이를 기반으로 한 북한의 성장과 체제의 점진적 변화에는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대전제가 깔려 있다. 북한이 성장하는 데는 천문학적 자금이 필요한데 한국이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은 북한의 핵 포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정상적인 동북아의 일원이 된 후에야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비로소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북한은 경제정책과 안보정책의 불일치로 혼선을 겪고 있고 이는 한국의 통일정책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공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문제가 해소된다면 보수ㆍ진보로 구분되는 국내 정치권에도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결국 남북경협의 진척과 국제사회의 지원 확대는 북한 핵문제의 완전 해결 여부에 달려 있는 셈이다. ◇“개성공단 성공 여부가 관건”=북한의 내부 발전을 위한 대북지원의 핵심은 남북경협이다. 지난달 ‘DMZ 평화상’ 학술연구상을 수상한 부르스 부에노 드 메스퀴타 미국 뉴욕대 석좌교수는 “경우에 따라 언제든지 급변할 수 있는 한반도 정세와 상관없이 남북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서로 유대감을 쌓아야 한다”며 “특히 남한은 북한 주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 지속적인 경제협력 추진을 통해 장래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남북경협 성패의 관건은 개성공단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박 교수는 “개성공단은 북한 개방은 물론 북한 당국 정책의 성공을 가늠케 하는 시금석이 되는 사업”이라며 “대외 환경만 바뀐다면 상당히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남북경협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동용승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통일을 대비한 경협인지, 아니면 단순히 남북관계를 유지하는 수준인지를 되짚어봐야 한다”며 “현재의 경협이 당장 북한에 필요한 것을 지원하기 위하거나 남북관계 개선의 모멘텀을 찾기 위한 것이라면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래를 위한 고민]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통일 비용-편익 함께 고려 北경제구조 개선 기여해야" 현재 통일과 통일 비용에는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우선 통일 비용이 엄청난 만큼 통일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여론이다. 반면 통일 비용은 현재 우리가 부담하고 있는 분단 비용으로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는 만큼 비용 때문에 수동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있다. 통일 비용은 남북한 체제통합 비용이다. 경제적 측면과 사회문화적 통합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해소 비용이 이에 포함된다. 반면 분단 비용은 일종의 기회비용으로 '통일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부담하는 비용'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군사비 등이 대표적 사례다. 통일 비용은 통일 편익(Unification benefit)과 동시에 고려하면 이해가 분명해진다. 통일 편익은 분단 비용 해소에 따른 이익과 함께 통일 한국의 비전과 관련해 미래에 발생할 이익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통일은 그 자체가 미래재(未來材)의 성격을 지닌다. 결국 통일 비용과 편익이라는 경제적 측면과 동북아의 국제정치적 측면이 종합적으로 고려돼야 통일에 대한 비전이 확실하게 제시될 것이다. 남북한 경협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북한에 단순히 물고기를 던져주는 방식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식을 알려주는 경제구조 개선에 기여하는 쪽으로 진행돼야 한다. 대북 지원에 대한 인도적 측면과 수익적 측면을 구분해 경협이 통일 과정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사전투자로 진행돼야 한다. 현재 한국은 경제가 어려워지고 북핵 사태 등으로 통일에 대한 심도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통일은 도전이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제 차기 정부에서도 점진적인 통일의 모습과 과정 등을 그려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