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후에는 백제 무령왕릉 발굴, 「한국사」 발간등 식민지문화의 때를 벗기위한 움직임이 활발했다. 70~80년대에는 중앙극립극장·예술의전당 건립 등 문화적 인프리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90년 들어서는 영화 「쉬리」 등 영상산업이 발달하고, 한국문화의 세계진출이 본격화되었다.한편 한국체육계는 암울했던 일제식민치하에서도 손기정선수가 세계무대를 제패하며 세계진출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광복후 경제발전에 따른 각분야의 성장과 함께 엘리트체육이 활성화되면서 76년 양정모가 올림픽 참가 31년만에 첫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한 88년에는 이땅에서 처음으로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개최됐다.
이후 98년 한국골프 100년만에 박세리가 세계무대를 석권하며 「골프여왕」으로 등극해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고통받는 전국민에게 벅찬 감동과 희망을 안겼다. 오는 2002년엔 월드컵이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개최될 예정이어서 한국민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문화부문
■한국 근대문학 태동 (1908년~)
1908년 최초의 신체시로 불리는 최남선의 「해에서 소년으로」, 17년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무정」 등이 발표됨으로써 근대문예사조가 시작되었다. 언문일치, 권선징악 초월, 현실묘사, 계몽주의 등이 특징이다. 자유연애·신교육사상·민족주주의 고취등 근대의식이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석굴암·무령왕릉 발굴(1910·71년)
세계 고고학계로부터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최고의 최미(最美)」라는 찬사를 받는 석굴암이 1910년 일본 총독부에 의해 발굴되었다. 유홍준 영남대 교수는 『모든 문화유산이 다 사라진다해도 석굴암이 남아준다면 한민족의 문화적 긍지는 손상받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71년에는 해방 후 국내 고고미술사상 최대의 발견이라 일컫는 공주 무령왕릉이 모습을 드러냈다. 웅진백제시대에 벽돌로 지은 이 무덤에서는 연대를 알려주는 지석(誌石), 왕과 왕비의 금제 관장식 등이 무더기로 쏟아져 역사기록에만 매달리던 기존 문헌사학의 한계를 일거에 극복했다.
■라디오·TV 방송 시작(27·56년)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27년 경성방송국에서 시작됐다. 56년에는 미국 RCA사가 최초의 TV방송 HLKZ를 설립했지만 운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본격적인 TV방송은 61년 KBS 개국부터. 지난 12월초에는 새 방송법 통과로 디지털방송과 위성방송 시대가 열림으로써 앞으로 5년간 200개의 채널이 더 늘어나고, 관련 시장만 7조원대에 달한 전망이다.
■「한글맞춤법 통일안」 발표·「우리말 큰사전」 완간(33·57년)
33년 조선어학회가 발표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오늘날 우리가 쓰고있는 국어 맞춤법 및 문법체계의 근간이 된 것으로 우리 문화사상 가장 획기적인 일 중의 하나이다. 57년에는 일제치하부터 시작한 「우리말 큰사전」 발간 사업이 10월9일 한글날에 맞춰 완성되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사전다운 사전을 처음으로 보유하게 되었다.
■안익태 「애국가」 작곡(36년)
안익태의 「애국가」가 나오기 전, 우리 민족은 이별가인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에 지금의 가사를 붙여 불러야만 했다. 이후 애국가는 일제치하에서는 해방의 상징으로, 해방뒤에는 독립국의 자긍심을 고취시켜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수립과 함께 정식 국가(國歌)가 되었다.
■다라니경 발견·직지심경 공개(66·72년)
이들 두 자료가 나오기 전에는 우리의 선진적인 고인쇄술을 기록을 통해 추정만 했을뿐 입증할만한 자료가 없었다. 이는 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세계최고의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발견으로 입증됐다. 또 지난 72년 파리 「세계 도서의 해 기념전」에서 첫선을 보인 「백운화상초록직지심체요절」(1377년)은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보다 약 1세기 앞선 것으로 우리의 우수한 인쇄술을 세계 만방에 과시했다.
■남산 국립극장·예술의전당 개관(73·88년)
문화 인프라 구축이란 의미를 지닌다. 50년 명동 시공관 건물에 개관한 국립극장은 73년 남산으로 옮겨 대극장, 소극장 등의 시설을 갖췄다. 또 국립극단·오페라단 등 8개 산하 공연단체를 거느려 명실공히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총본산이다. 88년에는 서울 우면산 7만평 부지에 예술의 전당이 개관돼 오페라극장·음악당 등 전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대규모 문화예술공간을 갖췄다.
■「한국사 전25권」 완간(78년)
6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10년간 한국사를 전공하는 학자를 비롯해 동·서양사, 고고학 및 인류학, 언어학, 사회학자 등 200여명을 학자를 동원해 완성했다. 주제중심의 통사체(通史體)로 고대, 고려, 조선, 근대로 시대구분을 했으며 민족주체성에 입각해 식민사관을 완전히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적 예술가들 등장(70년대~)
「세계 10대 현대음악가」로 꼽히는 윤이상,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한 백남준, 89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상임지휘자로 임명된 정명훈 등은 한국 문화의 수준을 한단계 올려 놓았다. 이밖에 백건우, 장영주, 강동석, 정명화 등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잇단 등록 (79~95년)
79년 신라 경주가 유네스코 「세계 10대 유적지」로 선정되었다. 95년에는 석굴암·팔만대장경·서울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고, 97년 서울 창덕궁과 조선시대 성곽 수원 화성이 추가로 등록을 마쳤다. 또 97년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이 세계기록문화로 선정됐다. 이에따라 우리의 유물이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인정받아 문화국가로서의 지위향상은 물론 관광홍보 효과도 높일 수 있게 됐다.
■영화 「서편제」, 「쉬리」 돌풍(93·98년)
영화 「서편제」는 서울에서만 관객 100만명을 돌파해 95년 「영상진흥 기본법」 제정 등 영화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98년에는 영화 「쉬리」가 20여억원에 달하는 수출계약을 비롯해 총 400여억원의 수입을 올려 「21세기 전략산업으로서 영화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95~96년)
일제가 26년 경복궁 근정문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움으로써 훼손됐던 경복궁의 위용이 건물 철거로 70년만에 제 모습을 찾았다. 일제의 상징을 제거하고 현대사의 아픔을 치유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건물 철거를 둘러싼 논란, 99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등은 한·일 관계의 올바른 정립이 쉽지 않음을 보여줬다.
■한국문화의 국제화(95년~)
95년 아시아 지역 유일의 국제미술 축제인 「광주비엔날레」 개막, 97년 서울 세계연극제 개막, 97년 뮤지컬 「명성황후」의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성공, 98년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한국실개관 등 90년대는 한국문화의 세계진출이 두드러졌다.
체육부문 ■손기정-황영조 올림픽 마라톤 우승(36년·92년)
1936년 8월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선수가 일제식민 치하에서 나라없는 한을 품고 달린 비운의 레이스에서 2시간 29분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한마디로 꺼지지않는 불길처럼 민족혼을 불태운 장엄한 레이스였다. 그뒤를 이어 황영조선수가 92년 8월9일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죽음의 언덕」이라 불리는 몬주익의 오르막길에서 일본의 모리시다를 극적으로 따돌리고 손기정옹의 베를린올림픽 제패 이후 56년만에 또 한번의 쾌거를 이룩했다. 이는 광복후 가장 값진 금메달이었다.
■양정모 광복후 올림픽참가 첫금메달 획득(76년)
한국스포츠는 45년 8·15광복 이후 갖가지 역경과 고난을 헤쳐가며 성장하면서도 올림픽에서는 단 1개의 금메달도 따내지 못했다. 그러나 레슬링의 양정모선수가 31년만인 76년 7월17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올림픽대회에서 마침내 한을 풀었다. 48년 런던대회에 처음 태극기를 앞세우고 올림픽 무대를 밟은지 여덟번만에 양정모가 조국에 첫 금메달을 안겼다. 자유형 페더급에 출전한 양선수는 몽골의 오이도프, 미국의 데이비스와 물고 물리는 접전끝에 벌점 차이로 패권을 차지했다.
■야구·축구·씨름 등 프로스포츠 출범(82년)
제5공화국에 들어서면서 이땅에도 프로스포츠가 태동했다. 82년 3월27일 프로야구가 화려하게 출범해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국내 최고의 프로종목으로 뿌리내렸다. 특히 프로야구는 미국식 지역 프랜차이즈제를 도입함으로써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야구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축구도 이듬해인 83년 5월8일 프로 시스템을 갖추고 슈퍼리그가 창설됐으며, 이에 앞서 3월16일에는 씨름의 프로화를 위해 민족씨름협회가 발족돼 4월13일 제1회 천하장사대회가 열렸다.
■서울올림픽 개최(88년 9월)
88년 9월17일 제24회 하계올림픽이 사상최다인 160개국 1만3,6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올림픽스타디움에서 개막됐다. 48년부터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한 뒤 40년만에 이땅에 유치한 첫 올림픽으로 아시아에서는 두번째 개최국이라는 의의와 함께 우리 민족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대회였다. 당시 세계신기록 33개, 세계타이기록 5개, 올림픽신기록 227개, 올림픽 타이기록 42개 등 풍성한 수확을 이끌어냈는데 한국은 금 10, 은 10, 동 11개로 구소련과 독일, 미국에 이어 종합순위 4위를 기록하는 대성과를 올렸다.
■1차 남북체육회담(90년 11월)
남북한 양측은 63년 동경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해 13번이나 회합을 가진 것을 비롯해 88년 서울올림픽, 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 이르기까지 다섯차례나 체육회담을 열었지만 번번이 결렬됐다. 이후 90년 11월29일 마침내 1차 남북체육회담이 성사됐고 91년 2월12일 4차 회담만에 「코리아」란 단일팀 구성안이 통과돼 그해 4월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또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8강 진출의 성과를 거뒀다.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결정(97년6월)
스위스 취리히 FIFA 본부에서 열린 집행위원회는 2002년 월드컵축구를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으로 열기로 결정했다. 일본에 비해 3년여나 늦은 93년 유치 의사를 표명한 우리나라는 주앙 아벨란제 FIFA회장을 등에 업은 일본을 단시일내에 맹추격해 막판 대세를 뒤집는데 성공했으나 결과는 양국 공동주최로 판가름났다. 월드컵 개최는 수익금 배분 외에도 부가가치 증대, 간접투자 확충 등 유무형의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박세리 미 LPGA투어 4승, 박찬호 미 메이저리그 14승(98년·97년)
98년 한국스포츠계 최고의 히로인은 단연 박세리였다. 데뷔 첫해에 LPGA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 등 4대 메이저대회 가운데 2개를 석권하며 통산 4승을 거두고 세계적인 「골프여왕」으로 등극했다. 박세리의 세계무대 제패는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한파로 좌절과 고통을 받고 있던 국민 모두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희망을 안겨줬다. 특히 US여자오픈 연장전에서 신발을 벗고 개울로 들어가 날린 불굴의 샷은 우리 모두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메리칸 드림」의 꿈을 안고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한 박찬호 역시 데뷔 2년만인 97시즌에서 14승, 98년엔 15승을 거두며 「코리안 특급」으로 자리잡았다.
최형욱기자CHOIHUK@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