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불안해지면 가장 먼저 `통화(通貨)`에 시그널이 온다. 개인과 기업을 막론하고 경제 주체들이 화폐 가치를 못 믿는 것이다. 달러 등 안정성이 강한 기축통화에 대해 환율이 먼저 불안해지고 뒤 따라 물가가 치솟는다.
이미 외환위기를 통해 뼈저리게 겪었던 이 같은 현상이 국내시장에서 최근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불경기가 수개월째 이어지는데다 금융시장 불안과 흉흉한 국제정세가 겹쳐지면서 달러를 사재기하고 외화를 불법으로 반출하는가 하면 국내투자보다는 해외투자를 선호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의 동요를 정부가 억지로 막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불안증후군이 없어지려면 기본적으로 대외여건이 안정되고 동시에 내부적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달러사재기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26일 오후 남대문 시장 그릇도매상가 옆골목. 속칭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는 이 곳 암달러시장에서 `달러 아줌마`들의 손은 바쁘다. 떡이나 양말장사를 하면서 달러환전까지 해주는 이들 암달러상들은 최근 이라크 전쟁과 북핵사태로 외환시장이 불안해지면서 최대호황을 맞고 있다.
이 곳에서 10년 넘게 장사했다는 암달러상 J씨(39)는 “최근들어 돈을 바꿔가려는 사람들이 외환위기 직후와 비슷할 정도로 크게 늘고 있다”며 “급한 사람들은 은행고시환율보다 200~300원 넘게 웃돈을 주며 달러를 바꿔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암달러상 P씨(44)는 “과거와는 달리 일반인들이 소문을 듣고 달러를 바꾸러 오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며 “금액도 커져서 1만달러 이상을 바꾸려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북핵사태가 처음 불거졌던 올초만 하더라도 달러사재기는 부유층들이 사는 강남일대와 은행의 프라이빗뱅킹(PB)센터 등 극히 일부에 한정됐었다. 그러나 최근 SK글로벌 사태로 인한 국가등급하락우려와 이라크전쟁 장기화에 따른 경기침체가 예상되면서 달러사재기는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은행 외화예금창구도 분주=이 같은 분위기는 시중은행의 외화예금창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경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환율상승에 따른 환차익을 얻기 위해 외화예금을 드는 고객들도 크게 늘고 있다.
외환은행 본점 창구에서 만난 K씨(35)는 “주식시장도 이라크 전쟁의 전황에 따라 출렁거리고 은행 금리도 낮아 여윳돈을 외화예금에다 넣으러 왔다”며 “환율이 1,300원만 넘어도 달러당 환차익을 50원가까이 볼 수 있어 은행 정기예금보다 훨씬 나은 투자수단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환율이 더 상승하기 전에 빨리 돈을 바꿔 외국에 있는 자녀들에게 송금하려는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 막내 아들을 영국에서 유학시키고 있다는 L씨(55)는 “과거 외환위기때 갑자기 환율이 상승하면서 어학연수를 하던 아들의 학비를 내지 못한 경험이 있다”며 “갑작스럽게 자식이 공부를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돈을 송금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외환은행 관계자는 “최근 외화예금을 하는 고객과 외화송금을 하는 고객들의 수가 약 10%이상 늘어났다”며 “특히 목돈을 한꺼번에 송금하는 고객들이 많아진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외화예금증가는 `시한폭탄`=은행측은 밀려드는 외화예금이 오히려 불안하기만 하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외화예금은 주로 1~3개월정도의 단기자금의 성향이 크다”며 “올 5월달까지 은행들이 갚아야 할 외화차입금이 40억달러가 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외화예금인출사태가 벌어진다면 은행들은 외환위기 때와 같은 유동성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다”고 걱정했다.
실제로 이달 초부터 시중은행들은 외화대출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오는 4월과 5월에 달러결제수요가 몰려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환율의 변동을 예측하기가 너무 힘들어 리스크 관리차원에서 최대한 대출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시중은행의 다른 관계자는 “한국은행에서는 외화예금이 늘어나 오히려 외부 충격에 강해졌다고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라며 “작은 위기에도 인출사태가 벌어지는 외화예금의 본질을 생각해볼 때 또 다른 시한폭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조의준기자 joyjun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