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까다로운 문화 접목

정기홍 <서울보증보험 사장>

지난 90년대 초쯤 ‘은행장추천위원회’ 제도를 새로 도입하기 위한 실무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은행장은 당국의 뜻에 따라 선임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와 같은 관행이 관치금융의 대표적인 폐해 사례로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던 터라 정부에서는 차제에 은행으로 하여금 스스로 행장을 선임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선진국의 사례를 꼼꼼히 뒤져보니 ‘은행장추천위원회’라는 좋은 제도가 있었다.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원회를 구성해 은행장을 자율적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한 절묘한 도구로, 선진국인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흔쾌히 이 제도를 도입했고 그 즉시 행장 선임 과정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큰 기대 속에 출범한 새로운 제도는 처음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우선 당사자인 은행원들은 오랫동안 길들여진 타율의 멍에를 벗지 못한 채 관의 눈치를 보느라 자율권을 행사하지 못해 당황했다. 당국은 당국대로 이번에야말로 관치의 오명을 확실히 씻겠다고 결연히 진행과정을 지켜볼 뿐이었다. 행장 선임권에 공백이 생기자 관치의 빈자리를 문외한인 정치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관치시절보다도 훨씬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서구의 선진 제도라 하더라도 우리 고유의 토양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엉뚱한 부작용만 커진다는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서구사회는 그 구성원의 사고방식이나 사회규범 및 가치관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학교에→간다’라는 사고 수순을 가진 우리에게 ‘나는(I)→간다(go)→학교에(to school)’라는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서양 문물이 그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이래서 서양에서 성공한 제도라고 해서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통할 거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은행장 공모제가 새로운 대안인 것처럼 유행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심사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쉬운 우리 풍토에서는 이것 또한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경영진에 대한 스톡옵션 도입 문제도 그 접근방식은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서양 사람들은 경영성과가 뚜렷한 경영자라면 그 능력과 리더십에 걸맞은 획기적인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정서는 아직은 아닌 것 같다. 경영진 당신들만의 공이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그리고 좀 과하지 않느냐 하는 불만 또한 없지 않은 것 같다. 비록 배고프더라도 함께한다면 참아낼 수 있다는 우리의 애틋한 동료애가 아직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아무리 모범적인 선진 제도라 할지라도 이를 받아들일 우리의 토양이 잘 정비돼 있지 않으면 소기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정책 입안자들은 확실히 유념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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