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 경제의 대명사로 꼽히는 일본에서 정부가 지난 2001년 3월의 월례 경제보고서를 통해 디플레이션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일본 디플레이션의 시작을 2000년대 이후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도 일본 경제에 드리운 디플레이션의 그림자는 거품경제가 붕괴된 1990년대 초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199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소비시장을 짙게 뒤덮었다.
20년 장기 디플레이션의 시작은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업계 곳곳에서 감지됐다. 1990년대 들어 경기부진이 이어지고 기업도산과 해고·임금삭감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면서 '안 먹고 안 입는' 소비자들이 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일본의 임금상승률도 거품붕괴 직전이던 1989년 4.7%에서 1999년에는 -4.7%로 폭락했다. 또 일본 내각부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미래 수입이나 자산 수준에 대해 불안해 하는 국민의 비중은 20~34세가 1990년 26.7%에서 2001년 48.6%로, 35~49세의 경우 24.1%에서 49.9%로 각각 늘었다. 지갑을 닫은 소비자를 끌어모으려면 가격을 낮추는 수밖에 없다. 물가하락과 불황이 악순환을 일으키는 이른바 '디플레이션 스파이럴'의 시작이다.
소비의 변화를 감지한 기업들은 일찌감치 저가 마케팅에 뛰어들었다. 우선 외식업계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본의 대표 외식업체인 스카이라크는 1993~1994년 기존 점포 가운데 상당수를 평균 객단가를 대폭 낮춘 저가형 매장으로 돌렸다. 소비자의 높은 호응에 중견업체들도 곧 저가공세에 나섰다.
특히 1994년 하반기부터 물가하락 기조가 뚜렷해지면서 유통업계에서는 '가격파괴'라는 표현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일본 맥도날드의 햄버거 가격은 1990년 초 210엔에서 1995년 130엔으로, 2001년에는 평일 기준 가격 65엔까지 내려갔다. 또 남성복과 가전제품·식품 등 특정 제품군으로 특화해 판매단가를 낮춘 신흥 유통업체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유통업계는 치열한 가격경쟁에 돌입했다. 여기에는 글로벌화와 규제완화 여파로 중국·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제조된 값싼 물품의 유입과 엔화 강세도 일조했다. 불황기의 유망업태로 100엔숍 이 각광을 받고 '유니클로' 등 저가의 기획 의류상품을 직접 제조·유통하는 일명 SPA 브랜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2인 이상 가구의 의류 및 장신구 구입액은 1991년 연간 30만2,328엔으로 정점을 찍은 뒤 하락하기 시작해 2011년에는 절반도 안 되는 14만4,817엔까지 떨어졌다.
값비싼 백화점에서 발길을 돌린 소비자들이 싼값에 비교적 괜찮은 물건을 살 수 있는 브랜드 매장으로 몰리면서 업계의 가격경쟁은 갈수록 심화하고 기업의 수익을 담보로 한 가격경쟁은 결국 일본 경제를 더 깊은 디플레이션의 늪으로 이끌었다. 국민경제의 종합적인 물가 수준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는 1994년을 고점으로 추락해 소비세율을 인상한 1997년을 제외하면 지난해까지도 플러스로 돌아서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