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나누는 삶, 더불어 사는 건축

노은주 가온건축 대표


일 년 전 날씨가 아주 화창했던 봄날 무렵, 국도를 따라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 한가운데로 접어들었다.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에 덮인 낡은 집 한 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뇌전증으로 경제활동이 어려운 남편,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사는 P씨의 집이었다. 작은 체구에 미소가 밝았던 그녀는 16년 전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활달한 성격이라 어려운 환경에도 요양사 일로 가족들의 생계를 꿋꿋이 꾸려가고 있었다.

집은 원래 축사 창고도 쓰던 것이라 지붕도 들뜨고 단열도 형편없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운 딱 그런 집이었다. 겨울철 방을 데우기 위해 설치한 연탄보일러 때문에 위험천만해 보이기도 했다. 창문이 몇 개 없어 방은 컴컴했다. 부엌도 집 밖의 재래식 화장실도 불편하기만 했다. 집 바깥에는 축사 관련 시설물이 쓰레기에 덮인 채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내가 P씨의 집을 찾은 것은 적십자에서 소외된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자 진행하는 '희망풍차' 사업의 건축 분야 자문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P씨는 그중에서도 저소득층 다문화가정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하모니' 프로젝트의 지원 대상자였다.

지원을 받게 되는 낙후된 집들은 대부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때문에 집수리 계획에 나름 세워 놓은 원칙이 있었다. 첫째 쾌적하고 안전한 집이 되도록 하자. 둘째 편안한 집이 되도록 설비를 개선하자. 셋째 내부 공간을 가족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구성하자. 넷째 외부 공간을 개선하자.


P씨 집은 우선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단열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또 환기와 채광을 위해 창문을 내야 했고 화장실도 집 안으로 끌어와야 했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들을 위해 방 배치를 조정하고 가족실을 겸한 공간이 있었으면 싶었다. 마당의 웃자란 풀들은 없애고 쓰레기를 치우면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에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쉼터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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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한정된 예산이었다. 병을 앓고 있는 P씨의 의료도 지원해야 했다. 전면 리모델링 수준의 공사를 진행할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불가능해 보였던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것은 우리 이웃의 작은 도움이었다. 적십자사 회원과 청소년적십자 학생들, 시공자의 도움으로 청소부터 시공까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치료비가 없어 병원 문턱도 넘어서지 못했던 남편도 치료만 받으면 80~90%가 완치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공사가 끝난 기념으로 모두가 모인 날. 아이들은 희망을 얻은 아버지가 소일거리를 통해 마련한 자전거를 타고 마당을 빙글빙글 돌았다. 불가능했던 프로젝트의 가장 행복한 장면이었다.

며칠 전 적십자 관계자로부터 병이 호전된 P씨 남편이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저 작은 아파트의 인테리어를 바꿀 정도의 적은 예산. 하모니 프로젝트는 해체될 뻔한 여러 가정을 어려움에서 구해내고 이들이 어려움에 놓인 다른 이들을 돕게 하는 아름다운 순환고리를 낳고 있다.

이 일을 통해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외된 이웃을 위한 따뜻한 손길을 보태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나누는 삶, 더불어 사는 건축. 작지만 이런 노력이 모인다면 섬세함이 부족한 정부의 복지정책보다 어려운 우리 이웃을 좀 더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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