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보험 제도가 점차 뿌리를 내리면서 은행을 비롯한 주요 금융기관의 발등에 불이 붙었다. 내년부터 도입되는 예금보험료율 차등화 시스템 때문.이는 경영이 건실한 금융기관에는 보험료를 낮게 매기고 재무구조가 취약한 곳에서는 더 받아가겠다는 취지다. 지금은 은행의 경우 경영상태에 관계없이 예금평균 잔액의 0.05%를 보험료로 내고 있다.
물론 『보험료 더 내는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해당 금융기관으로서는 사정이 다르다.
보험료를 많이 내는 금융기관에는 「부실」이란 국가공인이 찍히게 되므로 대량 예금인출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더구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예금보험기관이 이를 무기삼아 금융기관의 생사여탈권까지 휘두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두렵기 짝이 없다.
우량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보험료가 줄어드니 반갑지만, 경영상황이 좋지 않은 금융기관으로선 달가울리가 없다. 이에 따라 각 금융기관별 등급이 매겨지고 보험료율이 차등화되면 보험료를 많이 내게된 기관들의 항의가 빗발치면서 논란을 겪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왜 차등화인가= 획일적인 예금보험 제도 운영이 예금자와 금융기관의 도덕적 위험(모럴 해저드)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시작됐다.
예금자 입장에서는 금융기관이 어떻게 되든 보험제도에 따라 자신의 예금을 보호받을 수 있으므로 고수익을 추구하게 되고, 금융기관은 예금보험을 믿고 고위험 고수익 전략을 채택, 부실화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모럴 해저드를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안이 차등보험료율 제도다.
예금자나 주주 등 이해 관계자가 투자에 앞서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따지게 되므로 부실 금융기관을 회피,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시장이 각 금융기관의 부실위험을 스스로 통제, 금융위기 발생 가능성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이같은 장점 때문에 미국은 지난 93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 운영하고 있으며 금융위기를 겪었던 스웨덴과 핀란드, 노르웨이, 아르헨티나, 페루, 멕시코 등도 이를 도입하거나 추진중이다.
◇금융시장 안정이 도입 전제조건= 다만 이 제도가 효과를 거두려면 한 금융기관의 부실이 다른 곳으로 파급되면서 연쇄부실화를 유발하는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 금융 시스템 교란을 억제할 수 있는 대형 우량 금융기관이 버티고 있어야 시장논리에 의한 정리작업이 진행될 수 있다.
예금공사는 우리나라에서도 보험료율을 차등화할 수 있는 여건이 차츰 마련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금융 구조조정이 마무리되어감에 따라 금융시장이 안정을 되찾고 있어 이제는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금융시장 운영 메카니즘이 정착될 것이란 기대다.
◇전면 도입은 어렵다= 예금공사는 그러나 우리 실정을 감안할 때 보험료율 차등화를 큰 폭으로 단행하기는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 금융시장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금융산업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구조조정 과정을 밟고 있긴 하지만, 상당 부문은 아직도 기로에서 헤메고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일부 금융권에선 전산화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회계장부의 투명성이나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차등보험료율 적용에 대한 개별 금융기관의 반발도 무시하기 어렵다.
◇은행, 보험부터 시행될 듯= 이에 따라 예금공사는 보험료율 차등화를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시행한다는 원칙을 마련해 놓고 있다.
공사 관계자는 『제도 도입 여건이 마련된 금융권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해 시행하되 금융권별 구조조정 진행 정도나 영업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기준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구조조정과 전산화에서 다른 금융권에 비해 진척이 빠른 은행과 보험 업종이 가장 먼저 차등화 대상으로 꼽힐 전망이다. 【한상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