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리비아 반군 트리폴리 장악] 무력투쟁 6개월만에 수도 입성… 분노가 환호로

■카다피 체제 종말까지<br>인권 변호사 석방 촉구 평화시위로 시작<br>다국적군 개입이 '반군 승리' 판세 바꿔

지난 2월15일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 도심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큰 무리를 이룬 사람들은 경찰서로 몰려갔다. 인권변호사 페시 테르빌이 정보국 요원들에게 체포된 데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시민들의 분노에 놀란 정보 당국은 곧바로 테르빌 변호사를 석방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ㆍ중동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튀니지 재스민 혁명이 노점상 한 명의 분신자살사건에서 촉발됐던 것처럼 철옹성 같았던 무아마르 카다피 독재정권 역시 벵가지에서 발생한 작은 시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일 밤, 반(反)카다피 진영을 이끌어온 반군들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 입성했다. 지난 42년 동안 리비아를 억압해온 카다피 정권은 무너졌고 카다피를 향한 시민들의 원성은 반군에 대한 환호로 바뀌었다. 트리폴리 녹색광장에는 녹색 국기 대신 반군을 상징하는 적ㆍ흑ㆍ녹의 삼색기가 걸렸다. 리비아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 만이었다. ◇평화시위에서 무력항쟁으로=국민들은 초기부터 갖은 압제와 탄압을 뚫고 평화적인 시위에 나섰다. 그들의 공감대는 한 가지. 40여년 동안 독재정권으로부터 억압받아온 분노였다. 특히 전통적으로 카다피 정권에 대한 반감정서가 강한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됐고 경찰과 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시위 발생 일주일 만에 1,000여명이 사망하자 시위대는 총을 들고 반격에 나서 이웃 도시 미스라타를 장악했다. 무장한 시민은 국제사회에서 반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벵가지에 대표기구인 국가위원회를 설립했다. 외국 주재 리비아 외교관들은 자국의 유혈사태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잇따라 사임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카다피 일가에 대한 자산 동결조치를 단행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리비아 제재안을 통과시켰다. ◇나토가 판세를 바꿨다=트리폴리를 향한 반군의 진격을 막기 위한 카다피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카다피군의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성토가 계속되자 유엔 안보리는 결국 3월17일 다국적군의 리비아 개입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ㆍ영국ㆍ프랑스 등이 주축이 된 북태평양조약기구(NATOㆍ나토)군은 같은 달 20일 '오디세이 새벽'이라는 작전명하에 공중과 해상에서 리비아를 공습했다. 카다피 일가의 천국, 트리폴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카다피는 차드 등 이웃 국가에서 용병까지 수입해 트리폴리 사수에 나섰지만 반군과 다국적군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트리폴리에 대한 나토군의 집중 공습에 4월에는 카다피의 6남과 손자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반군들은 리비아 내에서 카다피군과 교전을 계속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합법기구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6월27일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카다피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리비아 반군은 7월15일 주요 30개국이 참여한 리비아연락그룹회의에서 리비아를 대표하는 합법기구로 인정받았다. 이달 들어 반군의 카다피 압박작전은 더욱 거세졌다. 석유도시 브레가와 자위야의 정유시설을 잇따라 점령하고 트리폴리로 향하는 물자 수송로와 송유관을 차단했다. 20일에는 트리폴리 진격의 요충지인 즐리탄마저 장악한 후 트리폴리를 향한 최종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인어의 새벽'이라 명명된 마지막 작전은 공격 시작 12시간 만에 반군의 트리폴리 입성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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