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스톡&스토리] 3·1운동의 도화선, 무곡열(貿穀熱)

'무오(戊午) 미소동(米騷動)'이 발생할 당시인 1918년 8월10일자 '정백미 상장변동 통지표'. 1년 만에 쌀값이 세 배 가까이 폭등했다.

위문복 하나대투증권 e-Business 지원부 부부장

1918년 7월23일 일본 오카야마에서는 부녀자들이 쌀값 인상에 항의해 정미소를 불태우는 사태가 발생했다. 쌀값 폭등으로 도탄에 빠진 일본 농민들의 소요사태는 8월13일 영목상점(鈴木商店)이 전소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전국적인 폭동으로 확대됐다. 초대 조선총독의 공로를 인정받아 총리에 올랐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일본 초유의 이른바 '미소동(米騷動)'으로 결국 9월29일 내각총사퇴와 함께 물러났다. 일본 정부는 본토의 쌀값 폭등에 대비해 값싸고 양질인 조선미를 대량으로 매수하고 있었다. 농무성이 15원 내외이던 조선미 1석당 5원의 보조금을 지급하며 영목상점 경성지점을 통해 은밀히 매수하고 있다는 소문이 증권가의 정보지를 통해 급속히 퍼졌다. 정보가 빨랐던 아라키중매점의 황목조태랑(荒木助太郎)이 인천미두취인소 사장 반전무등웅(飯田茂登雄), 일본18은행 지배인 삼상길(森常吉)과 결탁해 기미선한(期米先限· 3개월물)을 대량으로 매수하자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무곡열(貿穀熱·방곡령 철폐 후의 곡물 무역 열풍)이 시작된 것.


인천미두취인소의 시세가 폭등하자 식량을 살 수 없던 하류층에서 전국적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에 총독부는 궁여지책으로 미염매(米廉賣)를 시행했다. 그러나 8월28일 오후2시 경성구제회의 종로소학교 임시 염매소에서 대기자 800명 이후 조기매진사태가 발생하자 배가 고프다고 항의하던 한 노파가 치안을 유지하던 경찰과의 마찰과정에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줄을 서 있던 군중들이 집단 시위에 나섰다. 이러한 시위 사태는 점차 전국적으로 번졌다. 쌀값의 폭등세가 일반물가 전반으로 번지자 평양의 동양연초회사와 겸이포의 미쓰비시제철소, 남만주철도 용산공장과 경성전기 전차과 등에서 동맹파업이 일어나는 등 임금노동자들의 저항도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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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스페인독감이 창궐한 10월부터는 몇 달 만에 조선에서 14만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추수할 농민이 부족해졌고 이로 인한 흉작으로 쌀값은 불에 기름을 부은 듯 50원마저 돌파했다. 이듬해 1월21일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조선인들의 민족적 설움은 극에 달했다. 쌀값 폭등으로 인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고종의 독살설과 함께 독립운동으로 전환됐다. 도쿄에서의 '2·8 독립선언'과 고종의 인산일 이틀 전의 '3·1 독립선언'으로 조선 전반도에는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인천에서 시작된 무곡열이 3·1운동의 먼 도화선이었다면 고종의 인산이 기폭제가 된 셈이다.

인천미두취인소의 무곡열 100여년 후인 현재의 서울 증권시장은 외국인들의 매매행태에 따라 3년째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최대주주가 외국인으로 바뀐 지는 이미 10년이 넘었다. 대한민국의 증권시장이 외국인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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