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김나영 기자의 一日一識] <37> 당신의 ‘처음’은 어땠나요?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어글리돌(Ugly doll)’. 못생긴 인형이란 뜻이지만 귀여운 괴물로 자리매김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인형은 못나도 귀여울진대, 사람은 그저 못나기만 한 경우가 많다. ‘처음’의 가치를 무시하고 되려 피해의식을 가지는 경우,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데 참지도 못하고 눈 감고 돌부터 던지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하는 모든 행동이 그렇습니다. 옹알이만 하던 아이가 ‘처음’ 엄마, 아빠를 소리 내 불렀던 때, 좋아하던 연인과의 ‘첫’ 입맞춤 등 처음은 쑥스럽고 어색하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행복감을 선사해 줍니다. 처음이란 단어에는 도전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해보지 않았던 영역에 들여놓는 첫 걸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순간을 축하해주고 격려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이란 게 전제된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 긍정적인 방향을 향한 새로운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틀을 깨는 처음’입니다. 특정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따로 정해진 매뉴얼이 있지는 않더라도 해오던 대로 하지 않으면 금새 눈에 띄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예상을 빗나가는 누군가의 행동은 ‘일탈’로 규정되면서 지켜보는 이들에게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잘못된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잡아주기,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주고 행동을 변화시킬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그냥 두기,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든 참견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든 간에 개인의 선택이니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태도를 취하더라도 ‘부자연스럽다’는 감정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잘못됐다’ ‘순리를 거스른다’고 여기는 데 좋게 볼 턱이 없습니다.


참 이상하죠?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꿈을 꿔라’ ‘도전하라’ ‘틀을 깨라’는 메시지를 봅니다. TV 광고에서, 친구의 SNS에서, 서점에 꽂힌 수많은 책에서. 세상은 우리에게 도전을 종용합니다. ‘판을 흔들어라, 그래야 성공한다.’ 말은 참 많이들 하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해오던 대로 하는 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몇몇 사람들은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지출해가며 불편한 길을 가기로 합니다. 많은 사람이 통행로로 사용해 온전한 길의 모습을 갖춘 곳 대신 수풀을 헤치고 가야만 하는 그런 곳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새 길을 개척한’ 사람의 용기는 높게 평가되지 않습니다. 되려 일을 만드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기 쉽습니다. 어떤 이들은 어른 노릇을 하려는지 ‘오랫동안 지켜온 방식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며 훈계를 늘어놓기도 합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틀을 깬 사람들이 골칫덩이에서 ‘혁신가’로 전환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을 것’.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결국 결과가 좋아야만 과정이 조명 받을 수 있습니다. 혁신을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인데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헛발질로 평가절하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처방’은 비난받기 일쑤입니다. 경영학 분야에서 혁신과 창조성을 강조한 학자가 이런 비판을 들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랍비 한 사람이 아픈 염소를 치료해 주고 있었는데, 그 염소가 얼마 못 가 죽었습니다. 주인이 랍비를 불러 그간 비싼 처방전과 약품 값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나지 않는 것을 힐책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이 염소가 살아 있었으면 적용할 수 있는 처방이 100가지는 넘었을 텐데!” 아무리 훌륭한 혁신, 전략이라 할지라도 결과로 보여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맥락입니다. 모든 성공은 사후적 합리성, 즉 성과로 평가 받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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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채용공고에 이런 질문이 달렸습니다. ‘이 회사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는데, 결국 특정인을 위해 눈속임용 공고를 낸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질문을 던진 사람은 ‘과거의 채용방식과는 다른 형태’였다는 점을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눈속임용’이라는 표현에는 본인의 기회를 앗아갔다는 울분이 서려 있었습니다. 정당치 못한 형태라면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라면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저 틀을 깼다는 이유만으로 매도한다는 건 성숙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새 길을 내는 것은 억지 논리로 덧입힌 돌팔매질이 아니라 박수를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을 던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눈을 꼭 감은 채 문제를 관통하는 사실과 전체 상황이 아니라, 본인이 듣고 알게 된 단순한 사실의 파편들을 끼워 맞춰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사실일까? 내가 아는 게 전부일까? 라는 질문은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처한 현실이 마음에 안 드니 ‘다른 방식’을 활용한 사람이 싫고 이게 다 기회를 뺏겼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 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초라한 본인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고통이 뒤따를 테니까요.

우리는 모두 수많은 처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한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첫 순간을 경험해야 합니다. 도전은 세상에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틀을 깨는 사람’에게 박수는 못 쳐 줄지언정 눈감고 돌을 던지는 ‘못난이’가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도전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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