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가 계약직을 선택한 사연은 기구하다. 재학생 때 시중은행 공채에 지원했지만 서류·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졸업 뒤 2금융권인 저축은행에도 원서를 넣어봤지만 해외파, 국내 명문대생에게 밀려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 자신감이 떨어진 김씨는 주로 고졸자가 지원하는 텔러직에도 지원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2년 넘는 백수 기간이 불안했던 김씨는 결국 A은행 계약직에 지원했고 면접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내몰린 대학생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김씨는 계약직으로 일하며 은행 공채를 다시 준비할 생각이지만 불안감은 여전하다.
대졸 은행원 공채 문이 좁아지자 구직자들이 텔러직·계약직 등으로 자신의 꿈을 낮춰가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졸 공채의 문은 줄어들고 그 자리를 경력단절여성, 특성화고 학생들이 채워가면서 뱅커의 꿈을 꿔왔던 대졸 구직자들의 한숨은 깊어가는 모습이다.
18일 금융계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올해 대졸 공채로 약 100명을 뽑을 예정이다. 이는 지난해 300명 대비 3분의1 수준이다. KB국민·우리은행 등 시중은행들은 지난해 각각 290명, 260명을 뽑았으며 올해도 예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채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118명을, 외환은행은 한 명도 뽑지 않았으며 통합 이슈로 양 은행은 올해 채용규모를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다만 준정부기관이라고 볼 수 있는 기업은행이 지난해 220명에서 올해 400명까지 채용을 늘릴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은행권 채용규모가 줄거나 예년 수준에 그치는 가운데 시중은행의 높은 문턱에 좌절한 대졸 구직자들이 2금융권 내지는 텔러직까지 전방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SBI저축은행의 지난해 말 대졸 공채는 150대1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전년(89대1) 대비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를 보였다. 웰컴저축은행도 현재 채용을 진행하고 있으며 문의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말 공채 때는 미국·호주·캐나다 등 외국 대학 출신 지원자만도 10여명이었다.
텔러직군의 경쟁도 상당하다. 우리은행이 이달 초 선발한 개인금융서비스직군(텔러직)에는 150명을 뽑는 데 8,000명이 몰렸다. 상당수가 대졸자들이었다. 최근 선발이 완료된 신한은행의 시간제 리테일서비스직도 50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이 직군에는 경력단절녀를 포함해 대졸·고졸자 모두가 지원했다. 기업은행의 지난해 준정규직 채용 경쟁률은 93대1이었다.
텔러직군도 사실상 정규직이어서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더 많은 구직자들은 최근 은행업권에서 사라지고 있는 '계약직'에 대거 지원하고 있다. 최근 은행들은 본부 부서, 일선 지점 등에서 필요한 인력을 계약직으로 탄력적으로 채용한다. 이들은 수시채용이기에 은행에서 숫자로 잡지도 않는다. 은행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림자인 셈이다.
농협은행의 경우 지난달 본사 근무 계약직 1명 채용에 100명이, 이번주 모집공고를 낸 본사 계약직 5명 채용에 66명이 지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