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 산책/12월 19일] 한 해가 간다

소띠인 내게 정말 특별했던 소의 해, 2009년이 어느덧 저문다. 정말 소처럼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소득은 별로였던 한 해였다고 회고하면 많은 이들이 엄살 피운다고 나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올해에 책을 네 권이나 출판한 작가가 소득이 별로 없다니. 믿지 않을 독자들을 위해 내 통장을 보여주며 소득과 지출을 낱낱이 보고하고 싶지만 한국 전업시인의 체면을 구기는 일은 삼가야 하리라. 아니 차라리 이참에 세게 돈 이야기를 해버릴까. 인생역전 없지만 괜찮았던 시간 시인과 돈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내 경험을 말하자면, 가난한 시인의 길을 내게 강요하는 사람일수록 돈을 무지 밝히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자신들은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부와 권력의 길을 향해 달려가면서 시인에게만 순결을 요구하는 분들이 제발 이 글을 읽기를 바란다. 지난 1992년 등단 이후 2008년까지 16년 동안 시집 3권에 산문집3권 장편소설1권을 펴냈으면서도 나는 아직 가난하다. 2년 전에 춘천의 아파트를 살 때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다 갚지 못했고 1,000만원 남은 빚을 갚기는커녕 더 빌려야 할 형편이다. 왜냐고? 혹시 최영미가 낭비가 심하지 않느냐고? 천만에. 작가가 된 뒤에 최근까지 나는 옷장이 한 통밖에 없었는데 겨울이 추운 춘천으로 이사 오며 두터운 이불을 수납할 작은 다용도장을 하나 장만해 요긴하게 쓰고 있다. 옷이며 신발을 수납할 곳이 없어서 새것을 사려면 오래 망설인다. 오랫동안 내 꿈이었던 가죽 부츠를 올해도 결국 장만하지 못했다. 충동 구매했다가 며칠 지나 겁이 나서 도로 물렸다. 계절마다 나는 단 한 켤레의 구두로 버틴다. 그런 내 사정을 알고 후배 숙경이 올 여름에 '두산 베어스' 야구경기의 시구를 앞두고 뭘 신을까 고민하는 내게 새하얀 운동화를 선물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래. 오로지 스포츠에 몰두할 때만 나는 내 통장의 잔액을 잊는다. 그래서 더욱 나는 운동에, 야구와 축구에 열광한다. 나만 아니라 소위 인기작가 몇몇을 제외한 우리나라 대다수 전업작가들이 도시근로자 최저소득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게 현실이다. 직장인들처럼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데다 얼마 되지 않는 인세와 원고료를 쪼개 매달 부모님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아주 적은 예산으로 생활하면서도 나는 일 년에 한번 해외여행은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 그 재미마저 없으면 죽어야지. 물론 여행경비의 일부를 나중에 여행에 관한 글을 쓰는 조건으로 출판사나 잡지사로부터 보조받은 적도 있지만 대개는 내 호주머니 돈으로 돌아다녔다. 지난 십여 년간 평균 2~3년에 한 권꼴로 신간을 펴내다 올 한 해 새 시집과 산문집을 잇달아 출판하며 나는 인생역전을 꿈꾸었다. 4권 중의 하나는 팔리겠지. 다 합쳐서 10만부는 나가겠지. 그러면 대출금도 갚고…. 내년에 캐나다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가까이 구경할 여유가 생기겠지. 그러나 내 기대만큼, 2009년의 첫날에 내가 기대했던 만큼 책이 팔리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아침에 출판사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시'가 4쇄에 들어간다는 희소식을 들었으니 어려운 출판시장에서 이 정도면 괜찮은 성적표다. 지난 일·미련 잊고 새해 맞길 열 번인지 스무 번인지 교정지를 지겹도록 보고 지인들에게 신간을 부치느라 우체국에 가고 야구경기를 보며 한 해가 다 간 것 같다. 새 책을 만지면서도 옛날처럼 크게 기쁘지 않았던 건, 책을 엮는 과정에서 내가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 지난 일. 어서 잊어야 내가 산다. 이래저래 마음고생 많고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바쁘고 고단했던 소의 해가 어서 가기를 나는 바란다. 용서는 짧고 후회는 길다. 내가 그들을 용서했듯이 그들도 나를 용서하기를…. 새해에는 부디 공문서 쓰는 일 만들지 말고 심신이 평화롭기를,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넘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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