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 산책] 죽어서도 義지킨 사육신


강원도 영월은 험한 산들이 병풍처럼 사방을 두르고 그 사이로 남한강 상류를 이루는 동강과 서강 두 줄기 강물이 이리저리 굽이져 흘러내리는 경치 빼어난 고을이다. 고을 지명이야 '편안히 넘어간다'는 뜻의 영월이지만 험준한 지형지세를 보건대 옛 사람들은 이 고을을 들고 나기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것은 이곳으로 유배당했다가 끝내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고 짧지만 한 많은 삶의 막을 내린 소년왕 단종도 마찬가지였다.

세조의 불의와 폭력에 맞서 반정시도


청령포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져 흐르며 삼면을 감싸 돌아 반도의 형상을 이루고 뒤는 깎아 세운 듯 험악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는 창살 없는 천연의 감옥이다. 1455년 6월 왕위를 숙부 수양대군에게 빼앗긴 단종은 그 해 사육신(死六臣)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듬해 6월28일 노산군으로 강등돼 삼엄한 호송을 받으며 광나루를 건넌 뒤 7일 만에 유배지 청령포에 이르렀다.

세종대왕의 뒤를 이은 문종은 병약한 체질이었다. 그는 재위 2년3개월만인 1452년 5월에 39세의 한창나이로 세상을 뜨고 불과 12세의 어린 철부지 홍위가 조선왕조 제6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그가 단종이다. 이에 앞서 문종은 자기가 일찍 죽을 것을 예감해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 및 집현전 학사들에게 여러 차례 세자의 뒷일을 당부했다.


일이 터진 것이 1453년 10월10일에 일어난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선수를 쳐서 일으킨 쿠데타였다. 김종서ㆍ황보인 같은 반대파는 물론 강력한 라이벌 안평대군과 이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ㆍ이조판서ㆍ병조판서 및 내외 병마도통사를 겸해 국정을 좌우지했다. 권력을 독차지한 수양대군은 그 뒤 1년 반 동안이나 이름뿐인 임금인 어린 단종을 들들 볶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그 이듬해인 1455년 6월에 단종을 상왕으로 쫓아내고 왕좌를 차지했다.

관련기사



그러나 단종의 양위를 불법 찬탈로 보고 단종의 복위를 위해 충신들이 들고일어났으니 곧 사육신사건이다. 해당 인물은 성삼문을 비롯해 이개, 형조참판 박팽년, 예조참판 하위지, 사예 유성원, 동지중추원사 유응부 등이다.

이들의 거사는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밀고했고 정창손은 이를 세조에게 알렸다. 거사 계획이 탄로나 모두 잡혀 들어가 세조의 친국을 당했다. 갖은 악형을 받았지만 아무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들은 함께 참수되고 머리는 모두 저자에 효수됐다. 이 중 유성원은 성균관에서 이 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가 부인과 마지막 술을 나누고 사당에 들어가 자결했다. 곧 이어 들이닥친 군졸들이 그의 시신을 끌어다 사지를 찢었다.

사육신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 영월로 유배돼 청령포에 갇혀 있던 단종은 그 해 늦여름에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처소를 영월읍 내 관풍헌으로 옮겼다. 그러나 세조 3년(1457)에 일어난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운동에 노한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보냈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그들의 충절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아

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거두려 하지 않았다. 그때 용기와 의협심을 갖춘 이 고을 호장(戶長)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해 동을지산에 모셨는데 현재 영월읍 서북쪽 3㎞ 지점에 위치한 사적 제196호 장릉이다. 이들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흐른 숙종 7년(1681). 사육신의 관작이 복구된 데 이어 숙종 24년에는 단종의 복위도 이뤄졌다.

비록 실패로 끝난 반정(反正)운동이었지만 사육신의 충절사는 왜 사람이 짧게 살더라도 바르게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히 일러준 역사의 교훈이다. 세조의 불의와 폭력에 맞서 꿋꿋이 싸우다 죽은 이들 사육신의 충절은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