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5·6 개각] 박재완 재정장관 내정자는


경남 마산 출생인 박재완(사진)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자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학질에 걸려서도 아버지의 등에 업혀 등교할 정도로 학업에 대한 열정이 깊었다. 가난한 시절 만큼이나 그의 삶은 굴곡이 많았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유신반대투쟁으로 1974년 11월(명동성당 구국성명서 작성·배포)과 1975년 4월(서울대 4·3가두시위·민청학년 1주년 ‘기념’ 집회), 두 차례나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사북 탄광에서는 한달 동안 직접 갱목을 들고 일을 했다. 하버드대에 다닐 당시에는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삶은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낸 이명박 대통령의 눈에 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삶의 여정 자체가 이 대통령과 닮은 꼴이었다. 박 내정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MB맨’으로 통한다. ‘왕의 남자’인 셈이다. 하지만 박 내정자가 학연이나 지연을 통해 이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 대통령과 직접적인 인연이 된 것은 대표 경선과정에서 비서실장으로서 이 대통령이 박 내정자의 일처리 과정과 능력을 눈 여겨 보면서부터 였다. 국회 입성도 배경을 가지고 들어서지 않았다. 탄핵열풍 속에서 휘청이던 한나라당에 교수출신 외부 영입 케이스로 전국구 9번을 배정 받았다. 이후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으로 인수위에 참여, 정부혁신ㆍ규제개혁 테스크포스(TF)팀장을 거쳐 정무수석비서관, 국정기획수석으로 청와대에서 잔뼈가 굵었다. 정권 초기 정부 조직개편 등이 대부분 박 내정자의 머릿속에서 그려졌을 정도다. 현 정권의 뼈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아랫사람에 대한 칭찬에 인색한 이 대통령도 박 내정자가 만든 정부조직 개편 법안에 대해서는 “잘됐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신뢰가 두텁다. 부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박 내정자는 당시 착실한 수재들의 코스였던 행정고시(23회)를 통해 관직에 들어섰다. 김석동 금융위원장, 류성걸 재정부 2차관, 주영섭 세제실장, 노대래 방사청장, 권혁세 금융감독원장 등이 동기다. 감사원과 재무부에서 사무관을 지낸 후 96년 대통령비서실 서기관으로 있다 관직을 떠나 2004년까지 성균관대 행정학과 교수를 지냈다. 2004년에는 시민 단체인 경제정의실천연합 정책위원장을 거쳐 제17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들어왔다. 2010년 청와대 국정과제수석을 지낸 후 청와대를 나와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박 내정자의 특이한 이력 중 하나는 2009∼2010년까지 청와대 불교신자 모임인 청불회(靑佛會) 회장을 지냈다는 점.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으로 대표되는 MB정부에서 불심을 달래는 인물 중 하나로도 꼽힌다. 박 내정자에 대해 주변에서는 ‘실력 있고 내공이 깊은…’이라고 평가한다. 상사의 심중을 정확히 읽어내고 보조를 맞추는 자세,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한 ‘끊임없는 준비’, 정치적 욕심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 뛰어난 학식과 이론적 토대 등은 그를 MB정권 실세 수석 중에 실세로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같은 박 내정자의 장점에는 성실함이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다. 17대 국회에서 박 내정자의 의원실 명의로 나간 보도자료는 2006년에 120건, 2007년에 95건. 17개 국회의원 중 최고였다. 국정기획수석 시절 역점과제로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이 좌절되면서 청와대에서 물러났지만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컴백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노동부 장관 재직시에는 전문성과 함께 예리한 판단력과 분석력으로 국회에서 그렇게 싫은 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평이다. 박 내정자는 개인적으로 ‘야구 마니아’로 통한다. 부산 출신인 그는 롯데자이언츠의 광팬이다. 또 박 내정자가 신문에 비쳐진 모습 중 하나가 경차를 타는 광경이다. 그는 알려진 경차 애호가다. 청와대 시절에는 마티즈를 타고 다녔고, 고용노동부 장관을 역임하면서도 아반떼 하이브리드를 타고 다닌다. 이런 모습 역시 이 대통령에게는 ‘아름답게’비춰졌을 것이다. 술을 즐겨 마시는데, ‘화합주’라면서 막걸리와 맥주, 소주, 양주를 모조리 탄 것을 돌린다. 한편 경제 수장에 오른 지금, 박 내정자는 지금까지의 정치적ㆍ관료적 삶과는 전혀 다른 무대에 올라 섰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현실 속에 놓인 경제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 앞에 놓인 과제들이 너무 많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기존 정부 경제전망을 수정하는 일이다. 2009년 윤증현 재정부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기존의 747 공약을 사실상 폐기하고 그 해 성장률을 -2%로 수정하면서 경제정책의 첫 단추를 잘 뀄다. 당초의 전망치는 ‘5% 경제성장, 3% 물가상승률’이지만 성장률은 4%대 중반으로, 물가는 3%대 중ㆍ후반대로 각각 수정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무엇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정부 경제정책의 중심을 물가로 천명한 상황인 만큼, 물가를 4% 아래로 낮추기 위해 성장률을 끌어내릴 수 밖에 없는 게 3기 경제팀의 한계다. 이미 연초부터 써온 갖가지 미시적 물가정책 수단이 사실상 시장에서 먹히지 않은 만큼 통화당국과의 적절한 정책조율 하에 금리정책을 어떻게 펴 나갈 것인지 관심이다. 재정건전성 유지는 어느 경제팀을 막론하고 추구해야 할 과제이지만 3기 경제팀에게는 그 짐이 한층 무겁다. 곳간에서 돈을 꺼내 쓰기는 쉽지만 지켜내기는 어려운 법. 더군다나 내년 총선ㆍ대선을 앞둔 마당에 정치권에서 포퓰리즘적 재정 요구가 빗발칠 상황에서 이를 이겨내고 정부 곳간을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는 총지출 증가를 억제해 올해 재정수지 적자를 국내총생산 대비 2%로, 내년에는 1%대까지 끌어 내릴 계획이지만 정부의 굳건한 의지 없이 지켜지기는 매우 힘들다. 서비스산업 선진화의 경우 현재로서는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성과일 수 있다는 게 안팎의 중론이다.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약국외 일반의약품(OTC) 판매 등은 보건복지부와 해당 업계 이익 단체들의 반발을 뚫지 않고서는 해결하기 힘든 과제인데 선거가 지상 과제인 청와대로서는 선뜻 재정부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박 내정자는 개각 직후 기자와의 통화에서 “서민 생활 안정과 일자리 창출에 사심 없이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뜨거운 가슴’과 ‘찬 머리’를 조화시키겠다고 했다.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이 힘겨운 서민들의 삶을 어루만지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주변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김영기기자 you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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