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는 원래 350년전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의 식민지 쟁탈전 과정에서 탄생했다.네덜란드 식민지 뉴암스테르담을 지키던 군인 출신 총독 페테르 스토이베산트가 뉴잉글런드 영국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맨해튼을 가로질러 세운 목책(Wall)이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에 스며있다.
역사상 최초의 주식 버블이라고 할 수 있는 '미시시피의 거품' 역시 전쟁의 소산이다.
스코틀란드 출신의 존 로(Jhon Law)가 루이 14세 서거후 프랑스를 섭정하던 도박 친구 오르레앙공을 설득해 만든 금융회사가 미시시피은행이다.
미시시피의 주가는 1719년 액면가의 40배에 이르렀다가 이듬해 2월부터 거품이 가라앉기 시작해 지불정지 사태까지 벌어졌고 로는 그해 5월 총지배인에서 사직한 뒤 도망쳤다.
탁월한 신용창출자라 할 수 있는 로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후유증인 국가채무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상업독점권을 얻는 대신 정부 채권을 인수하는 방편으로 미시시피은행을 설립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빅보드가 무기한 휴장에 들어간 1873년 9월의 공황은 무리한 철도건설에 매달리다 파산한 제이 쿡(Jay Cooke) 은행에서 비롯됐지만 이에 앞서 1869년 9월 제이 굴드(Jay Gould)의 금매집 투기사건이 있었고 그 근저에는 미국이 남북전쟁 기간 동안 금본위제를 이탈해 허용한 불환지폐 그린백의 1대1 교환비율을 전후에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예외적으로 인정한 무모함이 있었다.
엔론의 분식회계 사건으로 시작해 타이코 인터내셔널, 제록스, 임클론, 월드컴, 머크에 이르기까지 꼬리를 무는 회계비리 의혹으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월스트리트는 10일 다우지수가 3.11% 하락해 9,000선 아래로 무너졌고 나스닥지수도 2.54%나 밀리는 등 지난해 9.11 테러사건 직후 수준을 보여주었다.
역대 미국 대통령중 첫 MBA 출신이라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직접 월가를 방문, 연설을 통해 믿음을 호소했으나 조지 소로스가 비아냥거리며 만들어낸 '부시 베어마켓'이라는 유행어는 추락하는 주가로 증명됐다.
더욱이 하켄 에너지의 주식처분 스캔들까지 치르고 있는 부시는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집권후 '람보 미국'에 집착하고 있으나 이젠 보다 큰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물론 1929년 대공황에 앞서 27개월 동안 월스트리트의 주가는 80% 가량 하락했고 일본의 닛케이지수도 89년 38,915포인트라는 정점에서 27개월 후에는 절반 가량에 머물렀던 만큼 오늘날 월스트리트의 파국이 앞으로 최악의 길을 걸을지 아닌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일련의 월스트리트 사태는 분명히 주식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 경제, 즉 주주자본주의에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1802년 이후 역대 미국 주식시장을 보면 평균 투자수익률은 평균 7%라는 통계가 있다.
하지만 지난 1966년부터 1981년까지 15년 동안 평균 투자수익률이 -0.4%이었으며 1982년 이후 15년 동안 평균 수익률이 12.8%로 다소 높은 편이었다.
사실 저축률 0%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미국인들은 지난 1999년 4조 달러를 뮤추얼펀드에 투자했고 이는 10년 동안 10배나 늘어난 수치다. 현재도 약 8,000만명의 미국인들이 직접 또는 뮤추얼펀드를 통해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
하여튼 CEO의 스톡옵션 행사 제한 등 갖가지 해결책이 난무하는 워싱턴 정가를 바라보면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부시 대통령의 호소마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500여년전 공자의 지침이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공자는 무기와 식량과 믿음 세가지를 놓고 부국강병책을 묻는 질문에 무기부터 먼저 버리라고 충고했다. 그는 이어 마지막까지 믿음을 버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인모<성장기업부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