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균 삼성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은 지난 99년 프랭클린템플턴 투신운용에 근무할 당시 ㈜태평양에 주목했다. 태평양은 뛰어난 기술력과 브랜드 파워를 갖춘 데다 방문판매라는 마케팅 수단에서는 경쟁자가 없는 우량 회사였다. 하지만, 주가는 2만원대에서 4년 이상 맴돌고 있었다. 이 본부장은 분석을 통해 태평양의 적정 가치가 10만원을 웃돌고 있음을 발견하고, 3월부터 태평양 주식을 매집하기 시작했다.
주식을 사들인 이후에도 1년 넘게 주가가 2만원 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이 본부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태평양이 제대로 평가를 받는 때가 올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태평양 주가는 가치주 바람을 타고, 2002년 3월 18만원 대까지 치솟았다. 이 본부장은 “아주머니들의 방문판매를 통해 좋은 제품을 지속적으로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경쟁사가 따라 올 수 없는 태평양만의 경험과 노하우였다”며 “태평양은 특히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이 투명해지고 있던 상황이어서, 사면 오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 본부장은 지금도 `좋은 기업을 좋은 가격에 사서 제 가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가치투자에 충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시장도 가치투자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실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재무구조 개선과 함께 경영 투명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주주 중심의 정책을 실시하는 등 투자환경이 가치투자에 유리한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와히드 버트(Wahid Butt) 시티글로벌마켓증권 리서치헤드는 지난 5월말 내놓은 한국시장 투자전략 보고서에서 “Korean market is cocaine for value investors(한국시장은 가치투자자에게는 마약처럼 매력적인 시장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시장에는 펀더멘털에 비해 저평가된 매력적인 주식이 많아, 가치투자자에게 좋은 투자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가치투자가 아직 주류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박정구 가치투자자문사장은 “아직까지 우리 시장에서 가치투자는 투자의 주류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며 “가치투자가 기본적으로 시장의 흐름에 역행하는 투자방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치투자는 사람들이 주식시장을 거들떠 보지도 않을 때 주식을 사는 용기는 물론 주가가 제자리를 찾아갈 때 까지 장기간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시각각 바뀌는 시장의 변화 속에서 이를 실천하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주가 변동성이 큰 한국증시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가치투자가 가능할까. 연간 목표수익률을 20% 안짝으로 잡는다면 가능하다. 본질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우량주를 골라 연 15%의 평가차익을 올리고, 여기다 배당수익으로 5%를 추가로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가치투자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다수 투자자들은 안전하고 수익성이 높은 가치투자를 외면할까. 주식을 투자가 아닌 투기로 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개인 투자자들의 의식 속에는 아직까지도 주식투자를 통해 일확천금을 꿈꾸는 투기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다”며 “이런 요소들이 가치투자는 물론 주식시장의 저변 확대를 가로 막고 있다”고 진단했다.
펀드평가사 제로인의 김성우 사장은 “종합주가지수가 500~1,000포인트의 박스권에서 주기적으로 등락하고 있는데다, 아직까지 투자할 만한 종목이 많지 않아 가치투자를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며 “가치투자를 추구하는 펀드매니저들은 상당 수 있지만, 돈을 맡긴 투자자들이 단기적인 성과를 요구하기 때문에 펀드를 중장기적으로 운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가치주는 언젠가는 뜬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자산운용업계에서는 이해균 삼성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과 이채권 동원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 강신우 PCA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 오성식 프랭클린템플턴투신운용 상무, 박정구 가치투자자문 사장 등을 대표적인 가치투자자로 꼽는다. 이들은 펀더멘털에 비해 저평가된 종목을 선택해 시황에 흔들리지 않고 참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그 가치를 인정 받는 때가 온다고 믿고 있다. 실제 나름대로의 원칙에 근거해 가치주를 선별, 장기투자 함으로써 뚜렷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펀드평가사 모닝스타코리아의 최태호 사장은 “시장가치 보다 기업의 내재가치가 크게 떨어졌을 때 주식을 매입하는 가치투자 전략은 결국에는 더 높은 수익을 돌려준다”며 “정책적으로 장기투자를 권장하고 금융교육과 개인의 재정관리를 학창시절부터 배울 수 있는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워렌 버펫식 가치 투자
"평소 잘 알고 있는 주식에 투자하라"
“마음에 드는 여성을 골라 애인과 헤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데이트를 신청하라.”
`가치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렌 버펫 은 학창시절 데이트를 이렇게 했다고 한다.
버펫의 이런 연애 스타일은 주식투자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미래 수익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기업을 선택해 주가와 기대수익률 등을 따지고 매수 시점을 기다린다. 이른바 워렌 버펫식 `가치투자`다.
버펫은 1956년 100달러로 주식 투자를 시작해 13년만인 1969년 2,500만달러를 만들었다. 현재 추정되는 그의 재산은 350억달러(약 42조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에 이어 세계 2위의 부자다. 미국 경제 전문 격주간지 `포천` 최신호(18일자)는 그를 `미국 경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했다.
버펫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지난 1990년대 후반 기술주 거품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전통주 투자만을 고집하는 버펫을 향해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2000년 기술주 거품이 꺼지자 그의 가치투자는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됐다. 지난 8일에는 버펫이 운영하는 투자지주회사 `버크셔 해더웨이`가 올해 2ㆍ4분기 순이익 22억3,000만달러(약 2조6,760억원)를 기록, 지난해 같은 기간 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고 발표, “역시 버펫”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버펫은 자신의 가치투자의 비결은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주식에 투자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버크셔 해더웨이의 2002년말 현재 포트폴리오를 살펴보면 코카콜라, 신용카드 업체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면도기로 유명한 질레트,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등 일반인에게도 친숙하면서도 사업 내용이 단순한 기업들로 구성돼 있다. 이 종목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시장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주주 가치를 중시하는 경영진에 운영된다는 점이다.
이런 기업들에 대해 버펫은 “10년 이상 묻어 둬도 될만한 기업”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버펫은 지난 1963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금융 스캔들에 휘말려 주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을 때 과감하게 주식을 매입한 이후 꾸준히 보유하고 있다. 또 1988년 처음 사들인 코카콜라 주식의 경우 영구 보유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버크셔 해더웨이가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의 경영 상태는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경제 전망보다 더 의미있는 지표”로 간주하는 애널리스트까지 등장했다.
[인터뷰]이채원 동원투신운용 주식운용 본부장
"저평가株 언젠가는 뜬다"
“기업가치 보다 저평가된 주식을 사서,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그 가치를 되돌려 받을 수 있습니다.”
이채원 동원투신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은 가치투자의 매력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이 본부장은 기업의 수익성, 자산가치, 배당 수익률을 기준으로 투자한다. 주식의 가치는 수익과 배당으로 결정되며, 자산적 가치가 보완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다 수익의 안정성과 성장성, 경영자의 자질, 재무건전성, 기업지배구조 등을 추가로 고려한다.
이 같은 투자철학은 지난 2000년 기술주 거품이 걷혔을 때 빛을 발했다. 대부분의 펀드매니저들이 시장의 흐름을 좇아 기술주를 사들였던 것과 달리 농심ㆍ롯데칠성 등 본질가치에 비해 저평가돼 있던 종목으로 큰 수익을 냈다.
이 본부장은 지난 2000년 4월부터 지난 달 말까지 4년 여간 누적 운용 수익률 112.02%를 기록하고 있다. 해마다 25%의 수익을 내며 한국시장에서도 가치투자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기간 종합주가지수는 오히려 15.53%가 하락했다.
이 본부장은 “시간이 흐르고 검증해 보면 결국 가치주를 선택한 것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며 “일반투자자들도 앞으로는 지수의 움직임 보다는 가치투자를 통해 장기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곤기자,노희영기자 mckids@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