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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상 우리나라는 고등교육의 천국이다. 대학 진학률은 81.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4년제대 학생 수는 200만명에 육박한다. 늘 교내 공사가 진행될 정도로 막대한 돈을 건물 신축에 쏟아부은 탓에 교육시설 등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그러나 대학교육의 질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운 수준이다. 스위스국제경영대학원(IMD)의 2010년 국가경쟁력 평가에 따르면 국내 대학의 사회부합도는 전체 57개국 중 46위다. 또 자격을 갖춘 엔지니어의 공급 수준은 47위에 머물렀다. 질 낮은 대학교육이 국가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외형적 성장에만 몰두하면서 정작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소홀해 학령인구 감소와 글로벌 경쟁이라는 위기 앞에 생존을 고민하는 '우물 안 공룡'이 바로 우리 대학의 현실이다.
◇외형성장 치중…학부 교육은 뒷전=대학의 위기는 교육수요자인 졸업생과 기업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는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본지가 창간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대학교육 만족도 조사에서 대졸 신입사원의 58.3%는 대학에서 배운 전공이나 지식이 취업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기업 인사담당자의 대학교육에 대한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5점에 불과했다. 이는 대학과 교수들이 외부 평가를 의식해 연구실적 등 외형성장에만 매달린 나머지 정작 중요한 학부 교육을 소홀히 한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백정하 한국대학교육협의회 고등교육연구소장은 "대학이 외형성장에 치중하다 보니 교육과정 개선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면서 "커리큘럼을 사회 요구에 맞게 융통성 있게 다양화하지 못했고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10년 전과 비교해 거의 변화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렇다 보니 학생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른다. 교수들이 교육보다는 연구실적을 더 중시하는데다 강의도 여전히 주입식ㆍ암기식 위주로 획일적이어서 문제해결 능력이나 창의성 등 기업이 요구하는 역량을 갖추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그렇다고 교수의 연구역량이 획기적으로 향상된 것도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과학기술논문색인(SCI) 논문 수는 세계 12위지만 최근 5년간 논문 1편당 피인용 횟수는 30위로 국제적 영향력이 매우 낮다. 대학과 교수 평가에서 논문 수가 주요 지표가 되다 보니 깊이 있는 연구보다는 숫자에 비중을 둔 결과다.
민경찬 연세대 교수(수학과)는 "교수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긴 호흡을 가지고 해야 하는데 평가가 지표 중심이다 보니 매년 논문 편수를 맞추는 데 급급했다"면서 "학부뿐 아니라 학점을 이수하고 논문 한편 쓰면 졸업하는 현 대학원 교육 역시 전문적 소양을 키우기 힘든 구조"라고 토로했다.
◇서열화에 목맨 닮은꼴 대학…무사안일 교수 사회=한국 대학의 낮은 경쟁력은 특성화ㆍ차별화보다는 획일적인 발전모델을 추구한 데서 비롯된다. 국공립대와 사립대, 연구중심대학과 학부중심대학 등 다양한 대학모델이 존재하는 미국과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 대학은 석ㆍ박사 중심의 종합대학에 치우쳐 있어 다양성이 크게 떨어진다. 학과나 전공만 놓고 보면 어느 대학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서열화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일류대학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안주하고 중하위권 대학은 일류대학의 예비 학생을 공급 받는 구조가 고착화되는 형국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연구보다는 학부 교육에 강점이 있는 대학이나 지역전략사업 분야 및 교육과정 특성화에 주력하는 지역기반대학이 나오기 힘들다. 류지성 삼성경제연구소 전문연구위원은 "대학 졸업생의 85% 이상이 곧바로 사회에 진출하는 상황에서도 학부 교육의 질을 중시하는 대학을 폄훼하고 연구중심대학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 때문에 학부 교육의 질 제고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면서 "지방 대학들도 지역 산업과 자치단체와의 연계를 통해 산업 클러스터의 거점 역할을 해야 하는데 모든 것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실에서는 지역 특성화 대학이 경쟁력을 갖추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낙후된 교수 인사관리도 대학 경쟁력 향상을 저해하는 주된 원인이다.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창출, 확산하는 교수의 역량과 능력은 대학교육의 질과 성과를 담보하는 핵심요소다. 국내 대학들이 교육 및 연구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우수 교원을 유치,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성과에 따른 보상체계가 미흡하다 보니 능력향상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대학이 교육과 연구 업적을 기준으로 연봉제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상당수 대학들은 연공서열 중심의 승진 및 급여체계를 고수하고 있다.
아울러 강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강의평가제가 도입됐지만 많은 대학이 교원 보호 차원에서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견해도 높다. 대학과 교수 사회에 아직 경쟁논리가 자리잡지 못한 탓이다.
유현숙 한국교육개발원 고등교육연구실장은 "외국에서는 교수 채용 단계에서 시장이 형성되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임용된 뒤에도 철저한 업적 위주로 승진이 되는 구조지만 우리나라는 그동안 교수 시장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없었다"면서 "강의평가 역시 도입 취지만 살려도 되는데 형식화되면서 강의 질 향상과 학생 요구 수용이라는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