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CEO & Story] 원경희 혜인 회장

"가장 기본은 사람…회사 아무리 어려워도 감원은 안해야죠"<br>경부고속道 건설에 불도저등 중장비 공급 '명성'<br>IMF때 희망퇴직자 내보낸 일 지금도 마음 아파<br>임직원들간 신뢰가 창업정신이자내인생의 원칙



"당시 고속도로 건설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지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식량원조까지 받던 나라 아닙니까. 일꾼들이 삽으로 땅을 파던 그 시절에 굴삭기나 불도저는 무엇을 하는 장비인지도 몰랐었죠." 7일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가 개통 40주년을 맞았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자본과 기술력의 한계에 도전한 고속도로 건설의 꿈이 닻을 올린 것은 1968년 2월. 2년여라는 짧은 시간에 약 430㎞의 도로를 놓는 대공사가 성공한 데는 국내 건설 및 산업용 중장비 업체 1세대인 혜인의 숨은 공이 컸다.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는 혜인의 원경희(64ㆍ사진) 회장은 "국내에 건설중장비라고는 없을 당시 혜인이 공급계약을 체결한 미국 캐터필러사의 건설중장비 222대가 건설현장에 투입되면서 경부고속도로가 2년 만에 완공됐다"며 "이후로도 건설장비 한 우물로 50년을 이어왔다"고 말했다. 50년 전 건설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가난한 나라' 한국에 건설장비 회사인 혜인을 설립한 이는 원 회장의 부친인 고(故) 원용석 창업주.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지낸 인물이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중장비 공급으로 이름을 알린 후 혜인은 캐터필러를 주축으로 한 건설중장비 수입업체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굵직한 SOC 사업 현장에 선진 장비와 솔루션을 제공해왔다. 선친으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원 회장은 1973년 평사원으로 혜인에 입사, 차곡차곡 승진의 계단을 올라 1995년부터 회사를 이끌어오고 있다. 격변의 시기였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 고위직에 몸담으며 미국 기업체와 사업 파트너 관계를 맺은 선친의 이력은 원 회장의 학창 시절을 보통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기억으로 채워놓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따금 집으로 들락거리는 외국인들을 보며 어설픈 영어 실력을 써보기도 했고 한일정상회담이 열린 1964년 연세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뒤로는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극심한 데모로 수업을 받는 날보다 몸을 피해다니기 바빴다. 남들과 달랐던 점은 다른 대학생들이 시위 진압대를 피해다니던 것과 달리 그는 데모하는 학생들로부터 도망을 다녀야 했다. "아버지가 한일회담 대표단으로 일본에 가 계신데 시위에 가담할 입장이 아니었죠. 결국 극심한 시위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어 2년 만에 대학은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사실 지난 37년간 몸담아오면서 회사와 직원들에 대한 애정이 뼛속까지 스며 있는 그이지만 회사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순탄하지 않았다.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LA에서 공부를 마친 뒤 아예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살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억지로 회사에 앉힌 겁니다."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며 웃음을 머금는 원 회장의 얼굴에는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지금 회사에는 4년 전 입사한 원 회장의 아들이 3대로 이어질 가업승계를 준비하고 있다. 아들은 자신의 희망으로 회사에 입사했다고 한다. 건설장비를 수입해 유통하는 사업구조상 겪어야 했던 어려움도 많았다. 국산 장비가 등장하자 정부가 중장비 수입을 제한하기 위해 30~40%의 높은 관세를 붙인 후 15년간은 매 순간이 힘들었다. 1997년 외환위기로 환율이 치솟자 물건을 팔아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시기가 이어졌다. 당시 희망퇴직으로 직원들을 내보낸 일은 지금까지도 원 회장에게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기본이 사람인데 그 기본을 줄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봉급을 깎을지언정 아무리 어려워도 감원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혜인은 지난 한 해 동안 80명에 육박하는 신입사원을 뽑아 직원 수를 300명까지 늘렸다. "사회경험이 없어도 젊고 시대에 맞는 젊은이를 뽑아 3년만 투자하면 회사에 맞는 인재를 육성할 수 있다"며 "눈앞에 연연하지 않고 3년 뒤 혜인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제 원 회장은 새로운 50년을 맞아 회사의 제2의 도약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중장비 사업만을 고수해오다 수년 전부터는 재생에너지와 자원 사업 등 신사업에 진출,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올해 매출 목표는 2,800억원, 50년의 업력과 과거 명성에 비하면 큰 규모는 아니지만 오는 2012년에 5,000억원을 돌파하고 머지않은 미래에 '1조 클럽'으로 도약하겠다는 것이 그의 비전이다. 이를 위한 원 회장 자신의 몫은 "회사가 더 성장할 '거리'를 보태주고 인재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회사가 해오던 일은 임직원들이 충분히 잘 해내고 있으니 믿고 맡기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료 간, 상사와 부하직원 간, 그리고 회사와 종업원 간의 신뢰"라며 "그것이야말로 창업 초기부터 혜인이 고수해온 사훈이자 집안의 가훈, 그리고 내 인생의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 원경희 회장은 ▦1944년 서울 출생 ▦1964년 연세대 영문과 입학 ▦1970년 미 풀러턴 캘리포니아 주립대 졸업 ▦1973년 혜인중기 입사 ▦1979년 혜인중기 엔진판매 부장 ▦1981년 혜인중기 중기 및 엔진판매 담당 이사 ▦1986년 혜인 엔진판매담당 상무 ▦1991년 혜인 부사장 ▦1995년 혜인 대표이사 사장 취임 ▦2008년 혜인 대표이사 회장 취임
태양광·자원개발사업 진출등 신성장동력 확보 나서
"기업은 전문성을 갖춰야 합니다. 창립 이후 줄곧 중장비 하나에 매달렸던 것도 그 때문이고요. 하지만 기업이란 결국 매출을 올리고 수익을 확대해 직원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제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업으로 영역을 넓혀야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원경희 회장은 지난 2005년부터 건설중장비 수입유통이라는, 기존의 영역에서 벗어난 신성장동력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2005년에 시작한 쓰레기매립장 가스발전 사업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태양광 사업에 진출했다. 지난달 말에는 희귀광물개발업체인 KMC를 인수, 자원개발사업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KMC는 몰리브덴 광산과 구리ㆍ금 등 비철금속의 선광 설비를 보유한 업체다. 원 회장은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앞으로 50년 뒤에는 자원 부족이 심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태양광 사업의 경우 2007년 10월 전남 해남군에 시간당 1,000kWp 급 발전소를 완공한 데 이어 지난해 8월에는 천안서비스센터 내에 제2 발전소까지 준공된 상태다. 원 회장은 "지난 50년간 글로벌 건설기계 제조업체들의 제품을 국내 건설 및 산업현장에 공급하며 건설 중장비 유통 분야의 1위 자리를 굳건히 했다면 50주년을 맞는 올해는 새로운 성장 엔진 확보와 외형성장을 위한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해"라고 말했다. 아울러 기존의 건설 중장비 사업에서도 급성장의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그는 기대하고 있다. 수십년간 손잡아왔던 미 캐터필러가 한국 내 생산거점을 두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소ㆍ중형 장비를 국내에서 조립ㆍ생산하게 된다면 국내 시장에서 부품을 대거 공급받는 것은 물론 완제품의 공급가격이 크게 낮아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상대적으로 열위였던 가격경쟁력을 갖추게 된다면 국내 중장비 시장의 판도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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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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