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2일] 고든 폭동


1780년 6월2일, 런던. 신교도 연합회의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이 템스강을 건너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했다. 하원에 청원을 넣기 위해서다. 청원의 내용은 가톨릭 차별법의 존속. 영국국교회 성립 이후 다져온 가톨릭 차별법을 1778년 국왕 조지 3세와 의회가 일부 해제한 데 따른 반발이다. 해군 중위 출신의 하원 의원인 조지 고든(당시 29세)경이 조직한 신교도 연합회가 주도한 청원행진 대열은 갈수록 불어났다. 가톨릭 해방에 반대하는 국교도뿐 아니라 물가고에 찌든 서민들과 아메리카 식민지와 전쟁으로 위축된 상업과 교역에 불만을 품은 상인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의사당을 포위한 6만여명의 시위대는 성당을 시작으로 가톨릭 국가들의 대사관에 불을 질렀다. 가톨릭 교도의 주택과 점포는 물론 정치인들의 자택도 습격당했다. 시내에 위치한 뉴게이트 감옥도 피습돼 죄수 2,000여명이 풀려났다. 폭동이 멈춘 것은 엿새 뒤. 잉글랜드 은행이 포위됐을 때 출동한 군대에 의해서다. 일주일 동안 계속된 폭동과 진압 과정에서 285명이 사망하고, 체포된 485명 중 25명이 처형당했다. 주모자 격인 고든은 반역죄로 기소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된 뒤 1786년 유대교로 개종, 외국(프랑스)과 영국 사법부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죄로 체포돼 복역하던 중 1793년 42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죽었다. 고든 폭동은 영국 사회 전체의 반성을 낳았다. ‘가톨릭이 당하는 꼴’을 방조하지 않고 조기 진압에 나섰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반란죄도 비켜갔던 고든이 유대교로 개종한 후에는 사소한 죄목으로 수감됐다는 점은 ‘무원칙’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원칙은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 그나마 영국은 다행이다. 반성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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