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충장사, 김덕령의 '忠孝성지'

임진왜란때 대활약 반란모함으로 억울한 옥사무등산 서남쪽 기슭인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1023의 충장사(忠壯祠)는 임진왜란때에 용맹을 떨쳐 숱한 왜적을 무찌른 의병대장 김덕령(金德齡)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일본이 역사적 죄상을 반성하고 사과하기는커녕 역사왜곡과 날조를 일삼고 있는 요즘 충장사를 찾아 왜적의 침범과 노략에 맞서 싸우다 귀중한 목숨을 바친 김덕령의 위업을 되새겨보며 참다운 충성과 효도의 길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것도 뜻깊은 역사기행이 될 듯하다. 충장사와 충장로는 모두 장군의 시호 충장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사당 뒤에는 천추의 한을 남긴채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장군의 묘가 있어 광산김씨 후손뿐아니라 장군의 우국충정을 추앙하는 후인의 발길이 끊이지않는다. 또한 무등산에는 장군이 삼을 심어놓고 높이뛰기훈련을 했다는 삼밭실, 담력을 길렀다는 뜀바위, 칼을 만들었다는 주검동, 말달리며 활쏘기연습을 했다는 백마능선 등이 있으니 광주사람들에게 김덕령은 무등산의 수호신이나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김덕령은 1568년(선조1) 현재 광주시 북구 충효동인 석저촌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초시에 급제하고 20세엔 당대의 석학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일단 귀향했다가 금산전투에서 형이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전사하고 이듬해 노모마저 돌아가자 상복을 입은채 격문을 돌려 5,000여 의병을 모았다. 1594년 1월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담양ㆍ남원을 지나고 4월엔 운봉ㆍ의령을 거쳐 진주에 이르렀다. 그리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영남방어전을 펼치기도 하고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수륙합동작전을 펼치는등 눈부신 활약으로 수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조정에서도 공에게 형조좌랑의 벼슬과 익호장군(翼虎將軍)칭호를 주고, 그의 의병에게는 충용군이란 부대명을 내리기도 했다. 장군은 체구는 작지만 남달리 용력이 뛰어난데다 무술도 빼어나 검술과 기사(騎射)에 능했으며 늘 무거운 철퇴를 양허리에 차고 다닌 하늘이 내린 장수감이었다. 그는 이처럼 지용을 겸비한 천부의 장수였지만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1595년부터 명과 왜가 강화교섭을 시작했는데 그해 10월 장군은 군졸을 함부로 죽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 고초를 겪다가 이듬해 2월 일단 석방돼 전주 본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이듬해 8월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에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아 또다시 서울로 잡혀올라갔다. 김덕령도 다른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조정의 명령에 따라 토벌작전에 출동했으나 난이 평정되자 반군과 내통햇다는 터무니없는 참소를 당했던 것이다. 예나 이제나 소인배들의 재주란 오로지 남을 헐뜯고 시기하는 것밖엔 없는 법. 당시의 임금 선조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울로 압송된 장군은 자신의 무고를 주장했고 그의 결백을 아는 몇몇 대신도 구명을 위해 탄원했건만 억울한 연루자 대부분이 풀려난 반면 그만은 유난히 선조의 미움을 받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1596년 9월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다. 멍청한 임금보다도 나라와 겨레에게 참다운 충성을 바친 올곧은 애국자였던 김덕령이 끝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유난히 의심이 많았고 왕권안보에 병적일 정도로 집착했던 선조가 백성의 영웅으로 인기높았던 이순신ㆍ곽재우에게 그랬듯이 김덕령 또한 잠재적 라이벌로 보고 죽음의 길로 내몬 것은 아니었을까. 뒤에 이순신이 자살과 마찬가지로 전사한 것이나 곽재우가 벼슬을 버리고 숨어산 것도 모두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비록 사후엔 복권돼 병조판서니 좌찬성이니 하는 벼슬이 추증되고 충장이란 공신호까지 내렸지만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짧지만 한많은 한삶을 마친 김덕령에게 그런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1974년 이장때 그의 관을 열자 400년전 돌아간 시신이 생시의 표정과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태어난 광산군 석저촌은 그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효동이라고 개명됐고, 그동안 선영하에 묻히지 못했던 시신도 1974년 현재의 장소로 이장했던 것이다. 솟을대문인 외삼문(충용문)과 내삼문(익호문)을 지나면 김덕령의 사당인 충장사요, 충장사 뒤쪽으로 돌아가면 공의 묘가 있다. 충장사 입구에는 전남도문화재민속자료1호로 지정된 공의 관곽과 의복 등이 보관된 유물전시관이 있다. ■ 여행메모 ▦교통= 서울에서 광주까지 고속버스ㆍ철도ㆍ항공편을 이용하고, 광주에선 신창동ㆍ무등산행, 신창동ㆍ충효동행, 호남대ㆍ무등산장행 시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한다. 승용차는 호남고속도로 동광주IC를 기점으로 진입, 광주시내를 거쳐 약2km를 남하하여 대원초등교-처암교-충민사 입구를 지나 약10km를 동쪽으로 들어가면 충장사 주차장이다. 황원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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