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한국땅을 처음으로 밟은 창하오는 그후로 거의 매년 한국을 찾아오게 된다. 94년 10월 28일에는 제1회 한중신예대항전이 열렸다. 창하오는 채 2개월도 되기 전에 다시 서울을 찾은 것이었다. 8월에는 막내의 입장에서 건너왔지만 이번에는 6소룡이 모두 출동했고 실제로 주장은 샤오웨이강6단이 맡았지만 창하오 역시 주장이나 다름없는 입장이었다. 6소룡에 맞선 한국 선수는 윤성현5단(주장), 최명훈3단, 이상훈2단, 양건2단, 이성재2단, 김영삼초단이었다. 8월의 대전 방식이 그대로 답습되어 선수들은 각각 2차례의 대국을 가졌다. 1차전에서는 사이좋게 3승3패, 2차전에서는 중국팀이 2승4패로 져서 우승은 한국에 돌아갔다. 창하오는 김영삼초단과 최명훈3단을 연파하여 왕레이와 함께 전승을 기록했다. 1995년 10월. 창하오는 제7회 동양증권배에 중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1년 사이에 그는 부쩍 성장해 있었다. 신장과 체중도 늘었거니와 전국선수권전을 제패했고 중일수퍼대항전에서는 5연승으로 기염을 토했다. 본선 대진추첨을 마친 창하오는 가슴이 뛰었다. 지난해 자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준 임선근8단과 1회전에서 맞닥뜨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스승 녜웨이핑9단은 추첨이 끝나자 창하오에게 말했다. “잘 됐구나. 작년에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 계속 밀어붙여라. 작년에는 마샤오춘9단이 우승했으니 이번에는 너도 야망을 한번 품어 보아라.” 창하오는 스승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우승하실 차례입니다.” 녜웨이핑은 전년도에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었다. /노승일ㆍ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