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17일] 애스터

모피 확보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중간 마진이 10배가 넘었기 때문.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로 아메리카 드림의 원조라는 존 제이콥 애스터(John Jacob Astor)도 모피로 돈을 벌었다. 1763년 독일의 푸줏간 집안에서 태어나 런던을 거쳐 스무살에 미국에 도착한 그의 성공 비결은 현지화. 우선 인디언 말을 배웠다. 피리 등 악기를 등짐에 지고 산골짜기까지 찾아와 즉석 연주회를 여는 그에게 인디언들은 쌓아둔 모피를 넘겼다. 1년에 한번씩 열리는 모피 교환시장과 관계없이 그의 가게에는 늘 모피가 넘쳤다. 주요지역엔 출장소까지 세워 모피를 독점한 그는 1812년 ‘미지의 극서부’로 불리던 태평양 연안에 상설 거래소 ‘포트 애스토리아’를 차렸다. 애스토리아는 미국이 영국과 스페인ㆍ러시아ㆍ멕시코를 제치고 태평양 연안 일대를 차지하는 거점 역할을 해냈다. 모피로 돈을 번 애스터의 다음 관심사는 태평양 무역. 모피 등을 중국ㆍ인도에 수출하고 차와 비단 등을 수입, 100배 수익을 올렸다. 애스터의 아시아 무역은 훗날 미국의 필리핀 진출과 일본 개항으로 이어졌다. 연이은 사업 성공으로 백만장자에 오른 애스터는 눈을 부동산으로 돌렸다. 모피회사 매각자금으로 뉴욕의 노른자위 땅을 사들인 것. 땅 값이 올라 1848년 85세로 사망하며 애스터는 2,000만달러(요즘 가치 77억달러)의 유산을 남겼다. 애스터의 아들은 부동산 가격폭등으로 유산을 두배 불렸다고 전해진다. 윌포드 애스토리아호텔도 그의 아들 대에 지어졌다. 후손이 많아 애스터의 부는 작게 쪼개졌지만 한가지 업적은 영원히 빛난다. 세계 최대 규모의 장서와 85개의 지역분관을 거느린 뉴욕공공도서관의 기반을 제공한 기부자라는 명예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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