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 2학년이던 청년은 "허송세월 할 수 없다"며 학교를 중퇴했다. 사업을 결심한 그의 손에 쥐어있던 밑천은 부친께 물려받은 연수 300석 규모의 농지가 전부였다. 당시 돈으로 3만원이던 재산을 갖고 항구도시 마산으로 가 정미업과 운송업을 시작했다. 훗날 호암(湖巖)이라 불린 청년 이병철(1910~1987)은 1938년 대구에 삼성상회를 창립하면서 사업의 터를 닦았다. 빈곤이 한반도를 짓누르던 당시, 사람들은 설탕이 없어 단맛 볼 기회는 거의 없었고 옷감이 부족해 입을 것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호암은 '제일'이란 이름으로 제당과 모직회사를 설립했다. 외국으로부터 수입 없이, 국내 제조업을 통해 물자를 공급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저자는 1935년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나 1959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입사한 기자 출신이다. 1970년 서울특파원으로 호암을 처음 만나 평생 가까이에서 지켜봤고 자신있게 그를 '한국 경제를 구축한 인물'로 평했다. 하지만 '경제 대통령'이라 불린 호암의 속내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에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 인연을 책으로 냈다. 초일류 삼성을 일으킨 호암의 창조적 삶과 경영철학을 담고 있다. 이번에 동시 출간된 일본어판은 '의인물용 용인물의(用人勿疑 疑人勿用)' 즉 '의심이 가면 채용하지 말고 채용했으면 믿고 맡기라'는 호암의 인재발굴의 기본철학으로 제목을 붙였다. 인재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 온 호암은 "시골 출신 직원들은 맛있는 김치가 그리울 것"이라는 생각에 공장 마루 밑에 김치독을 가득 채우라고 지시할 만큼 사람을 아꼈고 인(仁)의 철학을 실천했다. 또 "나는 두 눈으로 15만명의 사원을 보지만 그들은 30만개의 눈으로 나를 본다"면서 항상 스스로를 반성했다. 능력자를 적절히 배치하는 '적재적소'를 인사에 중시했다. 골프를 치더라도 그 교훈을 삶과 사업에 반영했다. 호암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강했고 특히 고미술품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다. 40년에 걸친 고미술품 수집의 역사는 개인의 취미를 넘어 민족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는 국보급 소장품들을 호암미술관에 기증했고 일반인들도 향유할 수 있게 했다. 이병철의 일생과 경영철학을 짚어본 저자는 "삼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잊어서는 안될 존재"로 호암의 셋째 아들이자 삼성의 2대 회장 이건희를 주목했다. 말미에 '에피소드와 어록으로 보는 이건희 경영'을 수록해 이어질 삼성의 미래를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