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경기도 광주에 물류창고를 짓겠다고 하자 가까이 지내던 출판계 동료들은 대부분 황당해 했다. 사무실에서 너무 멀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행본 출판사에 무슨 물류창고가 1,000평이나 필요한지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의 염려를 웃어넘기고 규모나 자동화 시설면에서 단행본 출판사로는 처음이라 할만한 물류창고를 건립했다. 또 1986년 명륜동 사옥에서 3년여 만에 장한평 대로변 성동구 용답동에 지상5층ㆍ지하1층(연건평 500평) 건물로 이전했다.
처음에는 지하 창고를 포함해 2개 층을 사용했으나 그리 오래지 않아 1,2층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모두 사용하게 되었는데 4,5층을 창고로 늘려 쓰면서 무거운 책을 일일이 지고 나르는 일이 없도록 건물 외벽에 화물용 리프트를 설치해 불편을 덜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4.5층 창고에 문제가 발생했다. 무거운 책이 가득 재여 있다 보니 바닥이며 벽에 금이 가는 등 건물안전에 무리를 준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건물이 주저앉는 게 아닐까 염려되어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 보니 “현재는 큰 문제가 없으나 더 이상 책을 쌓아 두면 안전이상을 야기할 수 있다”는 소견이 나왔다.
그 후에는 더 이상 책을 쌓지 않고 사옥 근처 별도의 창고 임대를 생각해 봤다. 그러나 임시방편일 뿐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물량을 감당해낼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즉시 수도권 지역을 돌아다니며 물류부지를 물색하다 89년 경기도 광주 태전리에 1,200평을 매입한 후 현대식 물류창고 구상에 들어갔다.
그곳을 물류 기지화하고 지방 물량까지 담당해 책의 신속한 유통을 꾀할 심산이었다. 최대한 자동화 시설을 갖추고 싶어 출판산업과 무관한 곳이라도 여기 저기 견학도 하면서 자문을 구했는데 내 구상대로 설계비를 뽑아 보니 건축비보다 자동화 설비 시설이 배 이상 들어가 아쉽지만 대부분의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납품 차량이 창고 내로 진입할 수 있게 하고 책을 팔레트를 이용해 지게차로 내려 적소에 운반할 수 있도록, 또는 상하층간에는 화물 리프트를 설치해 무거운 책을 손으로 직접 나르는 일이 없게 하는 차원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창고 준공 후 처음에 책을 받으려 하자 납품 업체에서는 거리가 멀다고 울상이더니 한 번 납품을 해 보고 나서는 등짐을 질 일도 없고 신속해서 좋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애로점도 발생했다.
지금이야 통신 기능이 좋아 서울 지방간 의사 소통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당시만 해도 서울 본사와 광주 물류 창고간 통화가 시외 전화이다 보니 전화연결도 잘 안 되고 통화료 부담이 꽤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무선으로 통화를 주고받는 `워키토키`였다. 청계천 전자상가를 뒤져 당장 본사 건물 옥상과 물류창고에 안테나를 세우고 무선통신 시설을 했더니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었다. 통화료도 안 들고 인터폰처럼 얼마든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안기부(국가정보원)에서 찾아왔다. 전파 감시장치에 이상한 전파가 계속 수신되어 조사를 했더니 예림당 본사와 태전리 물류 창고간에 오가는 무선 통신이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러한 시스템은 전파관리법에 저촉되는 것이어서 편리하게 사용했던 무선통신은 2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10년도 훨씬 지난 지금 많은 출판사들이 물류공간 확보를 위해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웬만한 공간은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면서 당시의 용단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필요가 발명을 낳기는 한다지만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우려가 현실로 닥쳐서는 이미 늦다. 시야는 멀리 두면서 생각은 많이, 결단은 신중히 그리고 행동은 신속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다.
<조충제기자 cjcho@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