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수필] 일하는 여자들의 소원

金仁淑(소설가) 오래전에, 아직 내 아이가 돌도 되기 전이었을 때 아이를 옆집 할머니 집에 맡긴 적이 있었다. 자식들을 분가시키고 환갑이 지난 노부부만 살고 있던 집이었다. 10년 전이었던 그때, 영아를 맡아주는 공공탁아시설 같은 데는 어디에도 없었다. 몇군데의 사설놀이방 같은 곳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 곳에서도 돌도 안 지난 아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모르겠다. 그때에도, 서울의 중심지역에는 그런 곳이 있었을지도. 어떻든, 당시의 나로서는 그런 곳을 찾을 수가 없었고, 온갖 궁리를 다 하던 끝에 겨우 찾아낸 것이 그 할머니의 도움이었다. 내키든 말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할머니는 아침에 아이를 데리러 왔고 저녁때가 되면 다시 아이를 데려다 주었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아이는 그 집에 가서 잘 먹고 잘 논다고 했다. 그러나 아침마다 아이는, 끌려가기 싫은 소처럼 울어댔고 나는 종일 아이 울음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후, 한참 후에 아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아이를 동네 무용학원에 보낸 적이 있었다. 무용을 가르치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세 살짜리도 받아주겠다고 하는 곳이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용보다는 뛰고 놀게 해주겠다는 원장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자기보다는 큰 아이들이라도 어쨌든 아이들과 섞여있으면 그게 훨씬 좋은 일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아이를 데리러 갈때마다 아이는 학원 쇼파에서 늘어지게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가지 않겠다고 매일 울었다. 그 시절에 내게 가장 분노스러웠던 것은, 내 아이를 맡아 키워줄 수 있는 시어머니를 내가 모시지 않고 있다는 것과 친정어머니가 너무 멀리 떨어져 사신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이 궁해지면 별 생각이 다 나는 법이다. 믿고 흐뭇하게 맡길 수 있는 탁아시설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나라가 무슨 제대로 된 나라냐고, 할 수 있는 만큼 욕도 실컷 했을 것이다. 이제 열살이 된 내 아이는 어미가 저를 다른 곳에 떼어놓기 위해 무슨 궁리를 하면서 살았는가도 기억하지 못하고, 혼자 집도 보고, 전화를 받으면 내 메시지도 적어놓을 줄 알고 계란후라이도 혼자 해먹을 줄 알게 되었다. 아무 도움도 없이 저 혼자 큰 셈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특히나, 맞벌이 부부의 아이를 대신 키워주던 할아버지가 9개월된 손주와 함께 불에 타 죽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들을때면 예전에 내가 느꼈던 분노와 비참함이 다시 떠오르면서, 아이가 고마워진다. 그리고 이 나라는 정말, 가장 기본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아직도 모르는구나 싶어진다. 아직도 50만명 가량의 아이들이 탁아시설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현실에 대한 보도를 접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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