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5월 3일] <1686> 파리 재개발


비좁고 불규칙하며 더러운 도시. 19세기 중반까지 파리의 모습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인구 급증에 따른 도시 환경 악화. 인구 65만명이던 1832년에는 콜레라가 발생, 2만명의 시민이 숨졌다. 마침 도심의 통풍시스템이 건강을 결정한다는 이론이 퍼지자 프랑스는 1841년 5월3일자로 파리 재개발법을 만들었다. 문제는 추진력. 돈도 돈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가 엇갈려 논의만 무성할 뿐 사업은 조금도 진행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나폴레옹Ⅲ세의 등장. 나폴레옹의 조카라는 후광을 업고 1848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1851년 친위 쿠테타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 나폴레옹Ⅲ세는 파리 개조 사업을 세느현 지사 오스만(Haussmann)에게 남겼다. 오스만은 1871년까지 재임하며 시내 비위생 구역을 정리하고 하수도 600㎞를 건설했으며 방사형 도로망과 철도 환상선을 깔았다. 파리시내에서는 500m 범위 안에 반드시 공원을 유치한다는 계획 아래 여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 대형 도심 숲과 28개의 중소규모 녹지를 조성했다. 파리에는 황제가 영국 망명시절에 경험한 런던에 버금가는 녹지가 생겼다. 의회를 거치지 않는 자금조성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직접 차용과 개발기금 공채 발행, 채권위임 발행을 혼용한 오스만의 자금조달 방식은 지금도 모범사례로 꼽힌다. 전세계 수도 재개발에 영향을 미친 오스만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엇갈린다. 철거된 건물만 2만여채. 신축 건물의 발코니 설계까지 간섭해 철거민과 건물주들의 원성을 샀다. 반란에 쉽게 대처하기 위해 파리를 뜯어고쳤다는 지적도 있다. 오스만은 나폴레옹Ⅲ세의 몰락(1871)과 동시에 퇴진했지만 공사는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아름다운 파리' 건설에는 최소한 50년이 걸렸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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