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17일] 카스티용 전투


1453년 7월17일, 프랑스 남부 카스티용(Castillon). 영국군 6,000여명과 프랑스군 1만3,000여명이 맞붙었다. 영국은 기마병 1,000여기를 앞세워 선공에 나섰으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 4,000여명의 영국군이 죽거나 다친 데 비해 프랑스군 사상자는 100명에 그쳤다. 불리한 전황을 바꿔보려던 영국의 의도가 완전히 꺾인 카스티용 전투로 1337년부터 시작된 백년전쟁도 사실상 끝났다. 강화조약은 훨씬 뒤인 1475년 체결됐으나 영국은 더 이상 프랑스 영토에 군대를 보내지 못했다. 카스티용 전투의 승패를 결정한 요인은 총포. 프랑스군은 서구국가 간 전쟁에서는 처음으로 포병과 총병을 대규모로 운용해 승기를 잡았다. 샤를 7세가 애써 키운 포병이 동원한 300여문의 중포와 핸드 캐논(화승총의 전신)을 보유한 700여명의 총병이 웨일스 장궁(롱보)에 의존한 영국군을 압도했다. 카스티용 전투 이후 각국은 화약무기에 주목했으나 문제는 돈. 무기개발과 병사 훈련, 전력유지 비용이 많이 드는 포병을 육성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재정규모와 국왕의 권력이 커졌다. 절대왕권 강화와 함께 근대가 열린 것이다. 패배한 영국은 장미전쟁이라는 혼란을 겪었지만 백년전쟁을 통해 탄탄한 제조업 기반을 닦았다. 전쟁의 공포를 피해 이민을 택한 플랑드르(오늘날 네덜란드ㆍ벨기에 지방) 기술자들에 의해 모직물 공업이 뿌리를 내렸다. 프랑스 내 영토를 모두 상실하는 통에 와인 산지까지 잃은 영국이 대체 공급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 와인산업도 싹텄다. 한국인들이 유독 좋아한다는 고급 와인 ‘샤토 탈보’도 카스티용 전투에서 영국군을 지휘하다 전사한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John Talbot) 장군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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