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희망봉(11월22일)

1497년 11월22일. 포르투갈의 선단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통과한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함선인 캐릭선 4척과 170여명의 선원이 리스본을 출발한 지 7개월 만이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일행은 이듬해 5월 인도 캘커타에 도착한다. 리스본에 귀환한 1499년 9월, 유럽은 열광한다. 숙원이던 인도 항로가 열린 것이다. 인도 항로의 개설은 동서 직교역으로 이어졌다. 1453년 비잔틴제국을 몰락시키며 유럽과 아시아의 길목을 막아버린 오스만투르크에 비싼 관세를 물지 않고도 동방의 재화가 유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마에 앞서 1492년 크리스토퍼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찾아냈지만 돈이 되지는 못했다. 황금과 후추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 두척의 배와 55명만이 살아 돌아온 가마 선단은 그렇지 않았다. 금보다 비싼 후추를 싣고 온 그는 비용의 60배가 넘는 이익을 남겼다. 포르투갈은 막대한 부를 쌓아 나갔다. 동양의 후추와 도자기ㆍ보석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불이 붙었다. 가마의 탐험 100년 후 네덜란드와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할 만큼 인도 항로는 선박으로 붐볐다. 대거 유입된 진귀한 동양물품은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렸다. 상업혁명이 촉발되고 산업혁명의 발아가 싹텄다. 희망봉의 원래 명칭은 ‘폭풍의 곶’. 1488년 처음 도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붙인 이름이다. 가마의 탐험 성공을 기리기 위해 포르투갈 왕 주앙 2세가 희망봉으로 바꿨다. 가마에 의해 열린 ‘대항해시대’ 이후 아시아에는 선교사에 이어 칼과 총ㆍ대포가 들이닥쳤다. 세계사의 헤게모니는 유럽으로 넘어갔다. 유럽인들이 바라본 ‘희망’은 제국주의 수탈을 알리는 ‘폭풍’이었다. /권홍우ㆍ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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