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베이징(北京) 6자회담을 기점으로 미 정부가 대북 접근 방안에 중대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미 정부는 6자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핵 폐기를 할 때까지 어떤 인센티브도 줄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수면 하에서는 여러 협상전략이 검토됐겠지만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미국의 입장은 북한의 선(先) 핵 폐기에 대한 원칙적인 강조였다.
그러나 6자회담 이후 이 부동의 전제조건을 누그러뜨리는 조짐이 뚜렷하다. 4일 베이징 6자회담 결과를 브리핑한 미 국무부 고위관리는 처음으로 북한의 조치에 상응하는 미국의 단계별 접근방안을 공론화했다. 이 방안은 북한이 취하는 비핵화 조치의 실행 단계마다 미국도 북한이 요구하는 안전보장, 에너지 지원,경제 제재 해제 등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고위 관리는 “북한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듣기 전에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치 않다”고 말해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기 이전이라도 `상응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부시 정부는 부인하겠지만 미국의 대북 핵 정책이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만한 획기적 변화다.
무엇보다 이 같은 정책이 부시 대통령의 승인 아래 베이징 6자회담의 기조연설에서 제시됐다는 점은 대북 협상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달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에서 콜린 파월 국무장관,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의 보고를 받고, 고위 국가안보 담당 관리들과의 회의 끝에 이 방안을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 타임스는 “새로운 협상 전략이 채택된 것은 미 정부가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으면 6자회담의 판이 깨질 수 있다는 미 국무부 내부와 한국 등 동맹국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결과”라고 분석했다. 향후 미 정부 내 온건파가 대북 강경론을 견제하면서 대북협상의 주도할 발판이 견고해 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런 변화가 어느 정도 구체성을 띨지를 가늠할 수 없다. 워싱턴 포스트는 “미 정부내에 대북 지원이 핵 폐기 이후에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는 주장과 `병행 조치`가 돼야 한다고 견해가 혼재돼 있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북한의 태도이다. 미 고위 관리는 “북한은 미국의 6자회담 기조연설문을 다시 뜯어 봐야 한다”고 말했다. 6자회담에 대한 북한의 불만은 미국의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결과라는 뜻이다.
일부에서는 미국의 유화적 태도가 북한이 건국기념일인 9ㆍ9절을 앞두고 핵 실험 등 위협적 행동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김승일 특파원 ksi8101@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