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도청 진실게임

김인모 논설위원

비밀을 지키기 위한 암호의 역사는 멀리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전 로마의 장군들은 전투지시 등 적군에게 감추어야 할 사항을 전달할 때 먼저 전령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전령의 두피에 전달문을 적은 뒤 머리가 길어지면 적군 지역을 뚫고 아군에게 가도록 명령했다. 고립된 아군은 다시 전령의 머리를 깎아 전달 내용을 알아내는 방식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첨단 통신장비와 갖가지 암호생성 원리가 나왔지만 비밀을 보장하는 의사소통의 근본적인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과거 남파 간첩들이 많이 사용하던 난수표 방식은 문자를 숫자배열로 바꾼 뒤 난수를 더해 보내면 수신자가 난수를 빼 해독했다. 또 인터넷상의 공개키 방식은 소인수분해가 어려운 120자리 숫자를 이용해 수신자가 똑같은 자물쇠, 즉 공개키를 나누어주고 송신자가 공개키로 가둔 데이터를 보내면 수신자만이 열쇠, 즉 개인키로 열어보게 된다. 최근 도청이나 해킹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기술로 알려진 양자암호통신도 좀더 복잡하지만 원리는 비슷하다. 음성신호와 광신호로 상호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암호키를 송신자와 수신자가 미리 교환한 뒤 제3자가 침입하면 단일광자가 갖는 양자역학 상태가 변해 도청당하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통신과 암호의 핵심은 쌍방향으로 합의한 사전약속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약속이 누설되거나 깨질 때 비밀은 더 이상 보장될 수 없다. 로마 전령의 비밀이 머리에 있다는 사실이 적군에게 알려지면 전략에 차질을 빚듯이 암호키가 해독되거나 복구방식이 누설되면 아무리 복잡한 첨단통신도 도청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국가정보원의 도청 파문으로 휴대전화의 통신비밀 보호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국정원의 도청 고백에도 불구하고 정보통신부는 이론적으로 가능할 뿐 통화시 음성신호가 3차례나 디지털신호로 변환되는 만큼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복제폰을 이용한 도청이 제한적이지만 언제든지 가능하고 어윈 제이콥스 퀄컴 회장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도청기술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정통부가 무작정 도청 불가능의 목소리를 높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별도의 내부 통신망이 아닌 이상 모든 정부기관의 웹사이트가 언제든지 해킹에 노출될 수 있듯이 아무리 복잡한 알고리즘의 암호키도 반드시 해독될 수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양자컴퓨터의 출현으로 공개키 기반구조가 와해됐듯 CDMA의 전환신호를 디코딩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정원 도청 파문은 국가기관의 초법적인 권한남용 문제가 핵심이며 통신이 갖춰야 할 비밀보호 원칙을 정부 스스로 와해시킨 배신적 관행이 낳은 비극이다. 그저 통신장비일 뿐인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도 서로 약속한 코드가 어그러지면 통신두절의 대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국가기관이 대국민 약속을 파기한다면 더 이상 사회적 통합이나 신뢰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최근의 기술적 추세를 감안한다면 국정원이 호소한 휴대전화의 합법적인 감청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부가 통신제한 조치를 하려고 통신회사에 관련 설비와 기술을 갖추도록 의무화한다면 비록 국정원이 합법적인 감청만을 엄격하게 시행하더라도 손쉬워진 도청 유혹은 민간에게까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유난히 빈번해지고 있는 개인정보 유출이나 사생활 침해, 사이버 폭력 등을 감안할 때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도청의 유혹은 정부기관에도 단절해야 하지만 민간기업이나 개인에게는 더더욱 허용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전국민이 불법도청에 노출될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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