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바둑영웅전 제1보

바둑영웅전 제1보조소년 귀국환영 기회 경남 함양 개평리에는 노사초의 생가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1875년에 이 집에서 태어났고 1945년 5월 23일(음력) 이 집 사랑방에서 별세했다. 필자는 1978년 6월 중순 취재차 그 집을 찾아가 노사초의 장남 상국(相國)씨와 하룻밤을 함께 지낸 일이 있다. 대지 1,000평 정도의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와 창고, 사당, 돼지우리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건물의 기둥은 환주(丸柱)로 국록이 있어온 가문임을 증명해 주었다. 사초의 증조부는 호조참판, 부친은 교리였고 아우는 도의원이었다. 아들 상국씨는 바둑 실력은 5급 정도였고 손자 철환(喆煥)군도 비슷하다고 했다. 상국씨는 휘문 출신이고 사초의 동생 준영(俊泳)씨는 휘문을 거쳐 와세다를 마쳤다고 했다. 기단 주변에는 노사초가 가산 800석을 내기바둑으로 탕진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그것은 사실인 듯하다. 선친 때까지는 800석 정도가 아니라 1백만평이 넘는 대농장주였다. 그런데 선친이 10만냥의 정치자금을 어음(보수파의 정점이었던 조대비의 친정아버지에게 떼어 준 어음)으로 약속하고 별세했다. 사초는 농장의 대부분을 처분하여 그 채무를 갚았다. 사초가 40세를 넘긴 후에는 남았던 전답마저 대부분이 없어져 내기바둑을 두는 경우에 항상 개평리 본가의 집문서를 걸고 두었다. 상국씨의 기억에 따르면 집의 등기가 27차례나 변경되었다고 하니 가족들의 근심은 극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소개하는 바둑은 조남철과의 대국보인데 노사초는 65세, 조남철은 17세였던 1940년에 둔 것이다. 노승일·바둑평론가 입력시간 2000/07/20 19:15 ◀ 이전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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