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 산책/6월 27일] 여걸 미실궁주

황원갑(소설가·역사연구가)

최근 MBC TV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이 화제 속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일대기를 그린 사극인데 초반부터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는 등장인물이 미실궁주(美室宮主)이다. 고현정이 연기하는 미실은 주역인 선덕여왕 못지않게 극에서 비중이 크다. 화랑세기' 통해 세상에 알려져
미실은 진흥왕 때 태어나 진평왕 때까지 약 40년 동안 빼어난 미색으로 제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르며 신라 정계를 좌지우지한 여걸이다. 미실은 진흥왕ㆍ진지왕ㆍ진평왕 등 3대에 걸쳐 후궁 노릇을 하면서도 세명의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를 사랑의 포로로 삼은 화랑의 대모와 같은 존재였다. 후궁의 몸으로 임금을 갈아치운 여걸, 이미 1,400여년 전에 숱한 사내를 굽어보던 이 대단한 여걸의 이름이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근래에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 필사본이 세상에 나타난 덕분이다. ‘화랑세기’가 전해주는 미실의 일생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미실은 진흥왕 5년(544)에서 진흥왕 9년(548) 사이에 태어나 진평왕 28년(606) 또는 그 이듬해에 60세를 약간 넘겨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실의 아버지는 제2세 풍월주 미진부, 어머니는 법흥왕의 후궁인 묘도부인인데 절세미인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태부리는 방법, 방중술의 비법 등 임금에게 여색으로 봉사하는 온갖 절기를 배웠다. 진흥왕이 즉위한 것은 540년. 그때 불과 7세였으므로 약 10년간을 지소태후가 섭정하며 중요한 국사는 중신인 이사부(異斯夫)ㆍ거칠부(居柒夫)와 상의하여 처리했다. 미실이 처음 시집간 남편은 지소태후와 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김세종이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태후의 눈 밖에 나서 궁에서 쫓겨났다. 미실과 제5세 풍월주 사다함의 비련이 시작된 해가 바로 그 해 561년(진흥왕 22)이었다. 그렇게 쫓겨난 미실은 사다함과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사다함이 가야정벌전에 출전하자 개선을 비는 노래를 지어주기도 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세종이 헛소리까지 하며 미실을 찾자 태후도 할 수 없이 미실에게 다시 입궁해 세종을 모시게 했다. 그래서 사다함은 미실을 빼앗긴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 죽었다. 미실이 세종 하나만 잘 모시고 살았다면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실은 그 뒤에도 진흥왕과 동륜태자ㆍ금륜태자 3부자를 비롯해 왕공ㆍ귀족 사내들과 끊임없이 염문을 이어갔다. 진흥왕의 총애를 받게 된 미실은 원화(源花) 제도를 부활시켜 달라고 해 풍월주를 없애고 자신이 원화가 돼 화랑들의 우두머리가 됐다. 진흥왕이 병들어 죽자 왕비 사도부인이 미실로 하여금 금륜태자와 정을 통하게 하고 황후 자리를 보장 받은 뒤에 비로소 보위에 오르게 했으니 그가 진지왕이다. 미실의 힘으로 임금이 됐건만 진지왕은 전날의 약속을 어기고 엽색 행각에만 몰두했다. 방탕한 세월을 보내던 진지왕은 미실이 주도한 화랑들의 쿠데타로 폐위당해 유폐됐다가 죽임을 당했다. 579년 7월이었다. 진지왕을 폐위시킨 사도태후와 미실은 사도태후의 손자요 죽은 동륜태자의 아들 김백정(金白淨)을 즉위시키니 그가 진평왕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40대, 50대로 늙어가니 한세상을 울리던 미모도 색이 바래갔다. ‘화랑세기’는 미실이 이상한 병에 걸려 앓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신라 정계 40년동안 좌지우지
요즈음 세상에서도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성 스캔들이 곧잘 터져 나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인 신라시대에 임금부터 화랑까지 자신의 치맛자락 안에서 정신없이 헤매게 만들었던 요화 미실, 사내들이 세상의 주인처럼 행세하던 시대에 숱한 사내와 세상을 쥐고 흔들던 대단한 여걸이 미실궁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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