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0월27일] 풍운아 마테이


[오늘의 경제소사/10월27일] 풍운아 마테이 권홍우 편집위원 마테이(Enrico Mattei)에게는 적이 많았다. 국제석유자본과 서방 정보기관이 이를 갈았다. 유전확보 경쟁 때문이다. 1906년 태어난 마테이의 청년기는 저항운동가. 24세부터 반 무솔리니 지하조직에 몸담았다. 경력 덕에 1945년 파산지경의 국영 석유회사를 맡은 그는 경영을 혁신해 미국계 메이저로부터 내수시장을 되찾아왔다. 정부가 포기한 국내유전 개발을 고집, 1949년 소규모 유전과 가스전도 찾아냈다.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1953년부터 본격적인 해외유전 개발에 나섰다. 문제는 틈이 없었다는 점. 새롭게 구성되는 컨소시엄에서도 메이저들이 지분을 주지 않자 마테이는 ‘석유 카르텔 일곱 자매(Seven Sisters)가 우리를 바보 취급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석유 메이저 7개사를 지칭하는 ‘일곱 자매’라는 용어가 이때부터 쓰였다. 분노한 마테이는 상을 따로 차렸다. 프랑스와 싸우던 알제리 반군을 지원해 독립 후 유전개발권을 얻어내고 이란에서는 유전 발견시 이익을 75대25로 나눈다는 계약을 맺어 메이저들을 경악시켰다. 50대50의 이익배분도 산유국 몫이 과도하다며 꺼리던 시절이다. 결정타는 소련산 원유 도입. 값싼 소련산 원유가 서방경제의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판단한 미국은 국무장관을 내세워 메이저들에게 마테이에 대한 양보를 종용하고 케네디 대통령과 면담 일정까지 잡았다. 마테이의 승리와 미국 방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1962년 10월27일, 의문의 전용기 추락으로 사망(56세)했기 때문이다. 벼락 탓이라는 당시 발표와 달리 최근에는 내부폭발이 있었다는 조사가 나왔다. 원인은 지금껏 베일 속이지만 확실한 것은 마테이 사후 소련산 원유 수입이 끊기고 국제석유자본에 거세게 대항한 사람도 더 이상 없었다는 사실이다. 입력시간 : 2006/10/2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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