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제6회 바다의 날/영광의 수상자들] 금탑산업훈장

박춘호 유엔 국제해양법 재판소 재판관 박춘호(71) 유엔 국제해양법 재판소 재판관은 지난 30년 동안 국내 학계에서 소홀히 취급해왔던 해양법 연구에 노력해 온 아시아 해양법 분야의 개척자다. 박 재판관은 국내 학계의 비아냥에도 아랑곳 않고 스스로 쌓은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어업협상이나 대륙붕, 배타적 경제수역(EEZ) 등 해양경제획정에 있어서도 우리의 국익을 지키는데 큰 도움을 줬다. 특히 한ㆍ일, 한ㆍ중 어업협상 과정에서는 개인적으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자문요청에 흔쾌히 응했고 이 과정에서 국제해양법의 흐름을 꿰뚫는 탁월한 식견과 전문지식으로 대외교섭논리를 제공하여 정부의 대외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또 아시아에서는 10명만 선임되는 국제학술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국제법체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지난 96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세계에서 21명뿐인 유엔 국제해양법 재판관으로 선출돼 우리나라 원양 어선들의 이익보호에 앞장서는 등 국위선양에 크게 기여했다. 지난 99년 10월에는 국제해양법재판소장 선거에서 인도출신에게 아깝게 패하기는 했으나 차기 재판소장 선거에서는 당선이 가장 유력할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 동경대학과 중국 북경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래 중ㆍ일의 해양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게 될 국제법 학도들을 제자로 길러내 우호적인 한ㆍ중, 한ㆍ일 해양교류가 가능하도록 토대를 닦음으로써 국위선양에도 한몫을 했다. 아시아 해양분쟁과 대륙붕, 해저자원 등 해양법에 대한 연구결과를 각종 학술지와 뉴욕타임스 등 언론에 실어 국제 학계에서 권위자로 인정 받고 있는 박 재판관은 유엔회의 등 국제학술대회에서는 독도문제 등 국익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73년 이후 23년간 유엔 제3차 해양법회의와 해양재판소 설립준비회의에 참가, 긴밀한 협조를 해왔다. 김성수 오양수산 회장 김성수(79) 오양수산(주) 회장은 지난 69년 회사를 설립, 초창기의 우리나라 원양어업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에도 24척의 원양어선과 5개의 수산가공공장을 운영함으로써 연간 1,200억원의 매출과 3,150만 달러의 수산물 수출을 통해 국내 수산물 유통과 가공산업발전을 이끌어 왔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배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바다로의 진출은 생각지도 못하던 69년 당시 낙후된 한국 수산업 환경을 극복하고 바다의 보고를 개발하여 수산 식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원양어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특히 그는 당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참치어업에 홀로 매진, 인도양과 태평양, 뉴질랜드, 대서양 라스팔마스, 모리타니아 해역 등 세계를 무대로 끊임없이 어장을 개척해 왔다. 이렇게 잡은 참치는 전량 해외로 수출함으로써 외화가 부족하던 70년대 우리나라의 외화가득률을 높이는데 공헌했다. 72년에는 1,500톤급 트롤어선 제70오양호를 건조하여 북양 명태어장에 진출시킴으로써 질 좋고 값싼 명태를 들여와 국내수급안정에 기여했다. 또 83년에는 국내 최초로 오양호(5.300톤급 공모선)에서 명태 선상연육 생산하고 명태 게맛살을 개발함으로써 국내 수산가공식품의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현재 명태 게맛살의 국내 수요는 연간 4,000억원대에 달하며 미국과 남미, 유럽 등 수출길도 넓어지고 있다. 김 회장은 동해안 주문진에 국내 최대의 젓갈공장을 준공한 84년에는 저염도 제품을 개발, 명란과 창란, 대구아가미 등 수요창출하고 국민 식생활개선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의 수출 길도 개척했다. 오양수산은 또 70년대 후반이후 해외어장진출에 각종 규제가 강화돼 제약을 받기 시작하자 뉴질랜드와 미국, 중국, 아르헨티나 등 외국과 합작회사 설립을 통해 어업협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이와 함께 76년에는 수산물 냉동ㆍ냉장업에 진출하여 원양산 수산물의 유통 혁신에도 이바지 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