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BN 관리본부를 찾아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는 동서를 가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두 달쯤 되는 때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분단된 동서독의 통일이었다. 거리에는 통일에 대한 감격과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곳곳에 무리지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서로 얼싸안고 포옹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분단된 한국에서 온 나에게 그런 모습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출협 이두영 사무국장과 현지에서 통역 겸 가이드로 고용한 유학생과 함께 베를린 장벽을 둘러보았다. 동서 베를린의 관문이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섰을 때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베를린 장벽은 두껍고 높은 콘크리트 장벽이었다. 벽은 군데군데 깨어져 있었고 깨어지지 않은 벽에는 온갖 색상의 페인트로 쓰여진 글자들이 두 세 겹씩 겹쳐져 있었다. 지난 45년 동안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던 담벽이 지금은 가까이 다가와 벽을 만져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으니 담벽 앞에 선 나 역시도 감개가 무량했다.
무너진 담장을 찾아보는 사람들 중에는 독일 사람들보다 관광객이 더 많은 듯했다. 담벽 아래쪽에는 장벽을 깨어낸 시멘트 조각을 늘어놓고 파는 상인들도 있었다. 망치로 큰 덩어리를 깨어가며 파는 사람들, 그것은 단순한 시멘트 조각이 아니라 냉전시대를 증언하는 역사적 기념품이었다. 깨어진 조각들을 들여다보고 만져보다가 한 조각씩 사가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나도 주먹보다 약간 적은 조각 하나를 구입했다. 용도로만 따진다면야 폐기물 처리장에 버려야 할 쓸모 없는 시멘트 조각에 불과했지만 이런 조각들이 모이고 모인 것이 베를린 장벽이었으니 이 작은 시멘트 조각 속에는 사상의 대립과 이념의 갈등이 스며 있고 자유와 평화,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필사적으로 담을 넘으려다 목숨을 잃은 수많은 동독 주민들의 한이 스며 있지 않은가?
장벽을 따라 남쪽으로 한참 내려다가 보니 장벽이 끝나는 곳에 큰 개울이 있고 개울 옆 잡초가 우거진 개천가로는 녹슨 철조망이 길게 쳐져 있었다. 담장처럼 이 개천 역시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다. 철조망에는 한두 송이씩 꽃들이 꽂혀져 있고 꽃다발도 하나 있었다. 살벌한 철조망과 색깔 고운 꽃다발이 묘한 대조를 보여 그 사연이 궁금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며칠 전에 동베를린을 탈출하던 사람이 꽃다발이 걸린 저기서 동베를린 경비병의 총격으로 사살당했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바로 그 자리에 꽃다발을 걸어 놓은 거지요.”
가이드인 유학생의 설명이었다. 며칠을 못 견디어 죽음의 길로 들어선 그 사람을 생각하니 나 역시도 안타까운 마음이 됐다. 자유란 목숨을 바꿀 만치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며칠 후의 일도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적 능력을 생각하니 삶과 죽음의 차이도 별게 아닌 듯했다. 우리는 동베를린에도 가보기로 했다. 삼엄했던 경계가 풀리기는 했지만 동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서는 간단한 검문을 받아야 했다.
서베를린의 거리가 밝고 활기찬 사람들로 가득한데 비해 동베를린의 거리는 한적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었다. 대형 건물마다 요란한 구호들이 곳곳에 써 붙여 있었다. 공산주의 만세! 당과 인민을 위해서…. 모든 구호가 그렇게 시작된다고 했다.
우리는 동베를린 중심가인 프리드리히 거리와 마르크스 거리, 알렉산더 광장을 둘러봤다. 거리 양옆은 10층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고 1층은 상가점포로 되어 있었지만 문 닫은 곳이 많았다. 거리에는 이 지역 사람들보다 관광객이 더 많은 듯했다.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 가장 잘 산다던 동독, 그 중에서도 동베를린의 모습이 이러하다면 다른 공산권 국가는 어떤 모습일까?
분배 우선의 경쟁 없는 사회는 발전보다 퇴보의 속도가 빠르다더니, 경쟁이야말로 향상과 발전의 동인이 아닐까 싶다.
<손철기자 runiro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