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이기주의에 우리경제의 하부구조인 중소기업이 멍들고 있다.
대기업들이 유동성 확보를 빌미로 대금 결제를 지연하거나 회피함에 따라 경제적 약자인 중소기업들이 최악의 자금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들마저 앞다퉈 대출회수에 나서면서 중소업계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 때 보다 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지속적으로 단가 후려치기와 함께 납품대금 지급을 늦춰온 대기업들이 최근 어음은 고사하고 물품보관증이나 인수증만 내주는 횡포를 부리고 있어 중소업체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심지어 당연히 줘야 할 선급금과 중도금을 미루고 납품이 완료된 뒤에야 납품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사례도 빈발하고 있어 중소업계의 불만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이와 함께 대형병원 등과 거래하는 일부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병원측의 리베이트성 꺾기와 장기할부 요구 등으로 도산위기까지 몰리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중소업체의 K사장은 “대기업 횡포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며 “곧 동종업계의 중소기업들이 대책회의를 열어 대정부ㆍ대언론 성명서를 발표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음대신 인수증=컴퓨터주변기기 생산업체인 D사는 최근 국내 굴지의 전자기업에 메모리카드 관련 제품을 공급했다. 하지만 대기업 측은 6개월 뒤에 대금을 준다며 납품대가로 물품 인수증만 끊어줬다. 이 때문에 자재구매와 생산을 위해 쏟아부었던 수억원의 돈이 회전이 안돼 가뜩이나 어려운 자금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이 회사 L사장은 “전에는 결제대금으로 어음을 받아다가 은행이나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바로 현금화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인수증은 아무런 신용기능이 없어 어음을 받을 때보다 자금운용이 더 힘들어졌다 ”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납품완료 뒤에야 계약서에 사인= 선급금은 통상 총 계약금액의 30~40% 규모여서 자금이 빡빡한 중소기업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돈이다. 그러나 SI업체인 B사는 SK계열사가 납품계약 즉시 순차적으로 내주던 선급금과 중도금을 아예 없애버려 한동안 자금난에 시달렸다. SK글로벌 사태 이후 SK 계열사들이 유동성 확보를 핑계로 선급금과 중도금을 안 주기 위해 납품계약서에 도장을 안 찎어준 때문이다.
I사는 결국 납품이 끝난 뒤에야 납품계약서를 작성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리베이트ㆍ장기할부 강요도=중소기업에게 리베이트성 꺾기나 장기할부 등을 강요하는 것도 여전하다. 의료기기ㆍ정보업계에서는 병원들이 제품 공급업체에 공급 가격의 일부분을 `꺽기`식으로 병원측에 적립할 것을 요구하기 일쑤다.
M사의 L사장은 “병원들이 외상이나 무이자 장기할부 등 불리한 결제조건을 내거는 것이 관행화돼 관련업체의 자금난은 이미 구조적인 문제로 자리잡았다”며 “과도한 외상매출채권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도를 맞는 기업들도 속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규진기자, 김민형기자 sky@sed.co.kr>